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향(당나라) (문단 편집) == 생애 == 옹주(雍州) 남전현(藍田縣) 출신으로,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현위(鄠縣尉)로 제수되었다. 수공(垂拱) 연간 초에 우대(右臺)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되었다. [[측천무후]]가 한왕 이원가와 노왕 이령기 등을 장차 주륙하려고 할 때 소향에게 국문을 명하였다. 소향은 근거도 없이 심문을 진행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소향이 이원가와 이령기 등에게 동정을 느꼈다고 모함하였다. 측천무후가 소향을 불러 힐문하자 소향은 항의하면서 회답하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기뻐하지 않았고 “경은 매우 고상한 선비로 짐이 마땅히 별도로 경을 구사할 것이니 이 감옥은 경에게 빌지 않겠다.”라고 말하였으며 결국 소향을 하서도(河西道) 감군(監軍)으로 임명하였고, 이후 소향은 5번 관직을 옮겨 우사낭중(右司郞中)이 되었다. 이후 어사 왕홍의(王弘義)가 내준신(來俊臣)에게 의지하고 무고한 이들을 모함하여 조정에서는 왕홍의를 꺼렸다. 왕홍의가 일찍이 괵주(虢州)에서 조서를 받들어 목재를 수집하였는데 인부를 부려먹을 때 절제가 없어서 많은 인부들이 죽자, 소향은 이를 살펴서 왕홍의를 탄핵하여 왕홍의의 파면을 이끌어냈다. 소향은 이윽고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하였고 거듭 좌숙정대(左肅政臺)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제수되었다. 당시 백사마판(白司馬阪)에 커다란 불상을 짓는다는 조서가 내려왔는데 불상을 지을 때 거액의 비용을 소모되자 소향은 농업을 방해한다며 상소를 올려 직언하였고, 측천무후는 이를 받아들였다. [[신룡정변]]으로 [[중종(당)|중종]]이 복벽한 이후 [[무삼사]]가 권력을 제멋대로 잡았다. 위월장(韋月將)은 무삼사가 장차 역모를 벌이려고 한다고 아뢰었지만 도리어 무삼사에게 참소를 당하여 중종이 위월장을 죽이도록 명하였다. 소향은 비상시에 형을 집행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었고 이로 말미암아 무삼사의 뜻을 거역하여 우어사대부(右御史大夫)로 전임되었다. 이윽고 소향은 기주(岐州) 자사를 맡았고 다시 우대대부(右臺大夫)가 되었다. 707년, [[절민태자]]가 정변을 일으켜 무삼사 일파를 주벌하다가 실패하고 죽자, 중종은 절민태자 일파에 대한 국문을 명하였다. 중종의 아우인 상왕 이단이 중종에게 인도되자, 소향은 상왕 이단을 보호하였다. 소향은 호부상서(戶部尚書)로 발탁되었고 하내군공(河內郡公)으로 책봉되었다. 이윽고 소향은 태자빈객(太子賓客), 검교첨사(檢校詹事)로 제수되었지만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소향은 개원(開元) 3년(715년)에 사망하여 연주(兗州) 도독으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35년 출생]][[분류:715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