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음 (문단 편집) == 발생 원인 == 대다수의 속음은 고대 문인들이 새로운 한자가 수입되어 들어왔을 때 스스로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잘못된 음을 주장한 상태에서, 이후 해당 와음이 관용음으로 정착된 경우이다. 주로 이런 경우, 한자의 여섯 가지 제자 원리인 [[육서]] 중 '[[형성자|형성]]'(形聲)[* A와 B를 합친 모양으로 만들어서 A는 뜻을 나타내고 B는 음을 나타내는 방식. 예를 들어 江은 왼쪽의 氵(水)가 뜻을 나타내고 오른쪽의 工이 음을(공 > 강) 나타낸다. 여기서 속음 문제라는 게 A+B로 구성된 합자가 있는데 그 글자의 음이 C임에도 B에 이끌려 그대로 B로 읽거나 B를 음부로 하는 다른 글자의 음에 맞춰 읽어버리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粘의 원음은 '념'인데도 오른쪽의 占에 이끌려 '점'으로 읽은 것이 굳어진 경우(전자)나 秒의 원음은 '묘'인데도 少를 음부로 하는 炒나 抄의 음에 맞춰 '초'라고 읽은 것이 굳어진 경우(후자)가 바로 이것.]에 치우친 발음이 나온다. 혹은 운서에 따라서 발생하기도 한다. 한국 한자음에서 특정 형성자의 발음이 같은 운의 다른 글자들에 동화된 사례는 대개 이 경우이다. [[한국 한자음]]에서 와음이 대거 발생한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운서는 <삼운통고(三韻通攷)>라는 책으로, 조선시대에 집필되었으나 정확한 집필자나 집필시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037년 [[북송]]의 정도(丁度)가 [[인종(송)|송 인종]]의 명을 받아 <예부운략(禮部韻略)>라는 운서를 지었는데, 삼운통고는 예부운략의 축약판이다. 중국의 운서들은 각 한자들을 표제어로 올리고 글자들의 음을 [[반절]]로 표기한 뒤 뜻을 설명하였으나, 삼운통고는 한자음을 반절로도 훈민정음으로도 적지 않았고, 해당 한자의 뜻을 간단히 두세 글자로만 풀이했을 따름이다.[* 중국의 운서들이 東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보자. 광운은 春方也說文曰動也从日在木中亦東風菜廣州記云陸地生莖赤和肉作羹味如酪香似蘭吳都賦云莫則東風扶留又姓舜七友有東不訾又漢複姓十三氏左傳魯郷東門襄仲後因氏焉齊有大夫東郭偃又有東宫得臣晉有東關嬖五神仙傳有廣陵人東陵聖母適杜氏齊景公時有隱居東陵者乃以爲氏丗本宋大夫東郷爲人賈執英賢傳云今高密有東郷姓宋有貟外郎東陽無疑撰齊諧記七卷昔有東閭子甞富貴後乞於道云吾爲相六年未薦一士夏禹之後東樓公封于杞後以爲氏莊子東野稷漢有平原東方朔曹瞞傳有南陽太守東里昆何氏姓苑有東萊氏德紅切 이라 하였고, 집운은 都籠切許慎說文動也从木官溥說从日在木中一曰春方也又姓文二十五涷說文水出發鳩山入於河爾雅暴雨謂之涷郭璞曰今江東呼夏月暴雨為涷雨引楚辭使涷雨兮灑塵一曰瀧涷沾漬 이라고 하였는데, 삼운통고는 달랑 '''春方'''이 끝이다.] 삼운통고는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포함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당대에도 삼운통고가 한학이란 관점에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만력본 배자 운부 예략을 보면 삼운통고가 청탁의 분별을 못해 성음이 그릇될 가능성이 있다고 까는 기록도 있고, 박두세가 삼운보유(三韻補遺)라는 수정본을 만들기도 했다.], 박성원(朴性源)은 1747년, 삼운통고에 한국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달고 정리하여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를 출간하였고, 화동정음통석운고가 조선 후기 운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면서 속음이 잔뜩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대표자로 기재된 한자가 와음으로 읽히는 경우, 그 한자와 같은 반절에 묶인 다른 글자들까지 [[도미노 현상]]으로 싸그리 와음이 되었다. 그리고 한자음이 여러 가지인 경우에 독음을 잘못 선택해서 정착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특히 인명에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잦다. 인명을 읽을 때 특정 발음으로 읽어야 할 글자를 널리 알려진 발음으로 뭉개 버리는 경우이다. 국가적 사안 때문에 임의로 발음이 변경된 경우도 있다. 주로 피휘(避諱)에 의해서 발음이 변경되는데, 후술할 祘은 원래 算(셈할 산)의 이체자였으나,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한 이후로 한국에서만 '성'으로 발음이 바뀌었다. 그 전에 [[손권]]이 아버지 [[손견]]을 추숭하는 과정에서 같은 발음의 甄(살필 견)을 '진'으로 읽게 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저 글자를 성으로 쓴다. 그래서 한때 견훤과 진훤이 같이 쓰이기도 했다.] 오늘날 베트남어에서 利는 lợi라고 읽는데 본래 발음대로 읽으면 lì라고 읽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후 레 왕조(後黎) 태조 黎利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않기 위해 利의 발음을 바꿔 lợi로 읽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利 자체의 발음이 완전히 바뀐 채로 정착되어 오늘날 黎利 본인의 이름을 부를 때도 바뀐 발음으로 읽는다고 한다. 즉, 본래 발음에 가까운 '레리'가 아니라 '레러이'로 읽는다는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