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속주 (문단 편집) === [[북아프리카]] === '''Africa''' 로마에서 두 번째로 밀 생산량이 많았던 지역이자 두 번째로 부유한 지역.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대략 현재의 튀니지, 알제리 북동쪽, 시르테 만을 따라 있는 서부 리비아 해안과 이집트 대부분을 포괄한다. 포에니 전쟁 직후, 카르타고에게 빼앗은 지역을 속주로 만든 까닭에 로마인들에게 아이깁투스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은 푸닉(Punic) 지방으로 불렸다. 이 일대에서 생산된 곡물 생산량은 매년 100만톤[* 이집트 일대를 제외한 북서아프리카 일대의 밀 생산량 기준이라고 한다. 이 중 매년 4분의 1이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로 수출됐다.]이었고, [[콩]], [[무화과]], [[건포도]], 직물, 대리석, 목재, 가축, 북아프리카산 명마, 도자기, 양모, 맹수 등 온갖 품목의 수출품의 명성은 반달족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제국 전체에서 대단했다. 더욱이 2세기부터는 이 지역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이 원로원 입성 후 부와 권력을 쥐거나, 사업 성공 후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 부동산을 사들여 로마 제국 전체의 권력을 쥐면서 기존의 로마-이탈리아 혈통 귀족들을 밀어내고 서기 2세기~4세기까지의 로마 원로원 내 보수적 귀족 세력과 갑부들의 고향이자 본거지로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와 함께 위세를 떨쳤다. 상술했듯, 편입 전부터 지중해 일대에서 1, 2위를 오갈 정도로 잘 살던 동네인 까닭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대단했다. 서방 기준으로 보면 본국 이탈리아가 제정 시대에 접어든 이후 부와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도 1, 2위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 덕분에 북이탈리아 일대보다 교육, 문화 수준이 월등히 높고 외적 침입도 없는 안전한 동네로 명성이 대단했다. 이는 동방과 견주어도 평가가 비슷해, 동방의 그리스, 아시아, 시리아 일대의 어떤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꿀리는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북아프리카 일대는 다른 속주들과 달리 일찍부터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두루 이주해 살면서 공존한 동네인 까닭에 문화적으로 자유롭고 민족간의 갈등도 적었다고 한다. 이런 명성처럼 카르타고, 하드루메툼, 렙티스 마그나 같은 대도시들은 서기 1세기 후반 [[도미티아누스]]부터 법학자, 수사학자, 희극 시인, 소설가, 의사, 천문학자, 문법가, 연설가, 전기작가, 전차기수, 건축가 등 제국에서 유명인 혹은 사회지도층으로 불린 이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당연히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외에도 이 지방에서 배출한 로마인들은 본국 이탈리아나 문화적 선진지역으로 평가받은 그리스, 아시아 일대보다 많았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스승인 법학자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하드루메툼이 낳은 천재적인 법학자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뛰어난 의술로 명성이 대단했던 아우구스티누스, 라틴어와 헬라어 모두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준 소설가 아풀레우스, 변호사이자 전기작가이며 호사가인 수에토니우스, 시인 드라콘티우스 등이 그들인데, 이들 외에도 2세기~3세기 초반 로마 원로원을 장악한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3세기 [[군인황제시대]] 이름난 전직 집정관과 그 후손들도 끝없이 배출됐다. 다만, 아이깁투스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옛 카르타고 일대인 까닭에 이 지역 출신 로마인들은 발음이 억세고 특유의 페니키아 억양이 묻어나 로마와 이탈리아로 이주해도 발음을 고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령 이 지역 출신들은 S를 / ʃ /로 읽었던데다, 우리말로 ㅅ, ㅆ으로 구분되는 발음도 모두 /ㅅ/으로 읽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또 A와 O 발음 역시 애매하게 발음하고, CH 발음도 /h/와 /X/로 각각 읽어 발음이 억세면서도 음율이 있고 밑받침을 잘 못했다고 한다. * '''해당 속주''' * '''[[이집트|아이깁투스]] 황제 직할령(Provincia Aegypti)''': 아이깁투스는 현재의 이집트 일대를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명칭이었으며 원래 이집트라는 말 자체가 아이깁투스를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다른 [[헬레니즘]]계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 후계국보다 오래 독립국으로서 버티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집트 특유의 폐쇄적 위치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지해 온 [[밀당|줄타기]] 외교 정책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기 동생과 권력을 나눠갖기 싫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끌어들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패착이 되었고 균형외교를 무너뜨렸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함으로써 모든 로마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로마 시민은 자기네 정치가가 외국 공주와 정략결혼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진 카이사르는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생아]] [[카이사리온]]까지 낳았어도 클레오파트라를 [[애인]]으로만 삼았지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을 감안해 카이사르의 유언에서 사생아 카이사리온은 빠져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불명.][* 또한 후일 황제가 되는 [[티투스]]도 유대 왕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긴 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다. 이는 티투스의 치세 내내 지지율이 높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2차 [[삼두정치]] 결렬 이후, 이집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전세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로 기울고 이는 안토니우스 패배 후 이집트가 속주가 아닌 황제 직할령이 된 원인이 된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최대의 밀셔틀이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거쳐 7세기 사산 왕조에게 정복될 때까지 약 700년간 어느 야만족의 침공을 받지 않고 열심히(?) 로마의 밀셔틀이 된다. 이집트는 다른 로마의 황제 속주와는 달리 황제 직할령인데 황제가 직접 이집트 장관을 임명하여 다스린다. 이 황제 직할령의 이점 중 하나는 이집트를 통해 수도에 공급되는 밀 공급량을 황제가 직접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김연아]]의 2009-10 시즌 갈라 프로그램이 마스네가 작곡한 '타이스의 명상곡'인데, 이 곡의 배경은 4세기-로마제국 말기의 여기, 즉 이집트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타이스의 명상곡은 원래 오페라 타이스(Thais)에서 막이 바뀔 때 나오는 음악이었다. 또한 오페라 타이스는 아나톨 프랑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이교도 여사제 타이스가 기독교의 수도승 아타나엘과 사이에서 종교적인 지조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다.] 직할령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 이스칸다리야]])다. *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속주(Provincia Creta et Cyrenaeca)''' ♠: 크레타는 말 그대로 현재의 그리스 [[크레타|크레테]] 섬이며 키레나이카는 현재의 리비아 바르카 지방(그리스어 명칭인 키레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입장에서는 상당히 [[백괴사전|백괴]]스러운 속주인데 크레타는 아카이아 같은 그리스 또는 가까운 아시아 속주에 묶지 않고 훨씬 먼 키레나이카와 묶어놓은 것도 웃기지만 정작 이 속주의 주도는 고르티나인데 크레테 섬에 있다(...). 위치는 현대 그리스 크레테 주의 주도 [[이라클리온]]에서 가깝다고 한다. * '''[[리비아|트리폴리타니아]] 속주(Provincia Tripolitania)''' ♠: 현 [[리비아]] 타라불루스 지방 일대. 속주 이름인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으로 더 유명하다. 주도는 [[렙티스 마그나]](현 리비아 콤스). 아프리카 속주 내지 푸닉 지방 태생으로 유명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기 전의 출신지로, 고향인 동네다. 어쨌든, 이 속주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를 배출했다. 속주의 주요 수출 품목은 올리브, 대추야자, 곡물이었고 대표산업은 농업과 노예 무역. 이 속주를 거쳐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서방, 동방 속주들로 향하는 품목들로는 금과 향신료, 포도주, 북아프리카산 말, 약재가 유명했는데, 이중 아프리카 내륙에서 공급된 노예와 금은 가라만테스인들이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한 해안 항구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편입 당시부터 농업 생산력이 대단한데다, 상업망도 카르타고인들이 만들어 놓은 까닭에, 일찍부터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이주해 있었고, 로마 편입 이후에는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 이주민들까지 넘어왔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페니키아 문화에 접목된데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도 높고, 서기 2세기까진 주변 침공도 없는 까닭에 평화로우면서도 국제성도 있고 묘한 매력이 있는 지방으로 이름 높았다고 한다. 다만, 푸닉 지방답게 옆동네의 아프리카 속주처럼 페니키아 억양이 남아 있고, 대농장주나 대상들이 많았다. 부유하기로는 편입 때부터 유명했지만, 바로 옆의 아프리카 속주와 달리 "렙티스의 흥망성쇠 = 트리폴리타니아의 흥망성쇠"라고 할 정도로 렙티스 마그나가 곧 이 속주의 모든 것이었던 동네다. 따라서 해당 속주의 주도 렙티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대대적인 후원을 받아 부두와 항만이 새롭게 건설되고 온갖 특권을 받았으며, 황제와 황족들의 기부로 건설된 대규모 공공건축물들이 세워질 당시에는 아프리카 속주와 푸닉 지방의 맹주를 놓고 다퉜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고향 렙티스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그리고 푸닉 지방으로 불린 아프리카 속주를 무척 사랑했다. 따라서 집권 직후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내리고, 푸닉 일대의 부흥에 힘을 쏟았는데 이때 그 수혜를 가장 많이 본 곳은 렙티스 마그나였다. 덕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트리폴리타니아의 주도 렙티스 마그나는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대적할 푸닉 지방의 대표 도시까지 오르게 된다.] 허나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고, 365년 렙티스 마그나가 [[쓰나미]]로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으면서 쇠락하게 된다. * '''[[아프리카]] 속주(Provincia Africa)''' ♠: 현 [[튀니지]] 일대로 주도는 처음엔 자마 레기아(그 유명한 [[자마 전투]]가 벌어진 곳 맞다. 현 튀니지 자마)에서 [[카르타고]](현 튀니지 카르타지.[* 튀니스 근교의 도시다. 튀니스 대도시권 안에 속한다.])로 옮겼다.[* 카르타고의 경우 [[7세기]]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최종 멸망하였는데, 이 멸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유럽지역의 로마 도시들은 개발과 맞물려 제대로 된 문화재 발굴도 어렵고, 또 개발이 잘 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많다고. 대표적으로 [[로마 지하철]]이 문화재 발굴 때문에 1호선을 만드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리고, 이제야 3호선을 만들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거대 도시들 중에서는 고대에는 타 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였으나, 근대에 그 도시를 제치고 거대도시가 된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톨레도]]-[[마드리드]]의 관계가 있다.] 제국 전체에서도 손 꼽히는 부유한 지역으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인들에게 푸닉 지방으로 불렸다. 속주 총독과 로마 속주 정부가 위치한 주도는 카르타고인데 이 도시는 3차 [[포에니 전쟁]] 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재건된 [[신도시]]다. 즉, 로마인들이 재건한 신(新) 카르타고로 과거 해상제국 카르타고 도시 위에 세워진 도시다. 때문에 원래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한다. 카르타고가 폐허였을 때의 주도는 우티카(현 튀니지 자나)이다. 아프리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은퇴 후 자신의 [[실업|일자리가]] [[백수|없어진]] [[사병]]을 정착시킨 땅이기도 하다. 즉 마리우스는 여기 속주를 최초의 기반 및 [[클리엔테스]]로 가지게 되었다. 1세기 말 ~ 3세기 초 로마 제국 내에서 권세를 휘두른 원로원 의원들의 본적지로 유명했던 곳으로, 전직집정관 중 힘 꽤나 쓰는 유력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속주 총독 부임지로 유명했다. 2세기부터 3세기 초까지만 대충 살펴보더라도 루피누스, 발레리우스 푸덴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등 오현제 시대동안 이름난 권세가부터 세베루스 왕조의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동안 율리아 마이사-율리아 마마이아를 도운 [[디오 카시우스]],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와 그 동생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비롯해 고르디아누스 1세 등 그 명단은 거의 전직 집정관 올스타 수준이다. 이는 3세기 말도 예외는 아니라서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동명이인 증손자 카시우스 디오 역시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막대한 재력과 권세를 이용해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자리를 차지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의 집정관, 법무관 명단들을 보면 아프리카 속주 출신 내지 그 본적이 아프리카 속주인 권세가가 상당히 많고 그들의 재산 규모도 엄청날 정도라고 한다. 2세기 후반인 세베루스 왕조 후기부터 군인황제 시대까지의 명단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세베루스 왕조부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까지 권세를 휘두른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형제와 그 일가 등 상당수 속주 총독과 집정관들이 이 지역 출신들이다.] 그 이유는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고, 상대하는 민원들도 한통속인데다 외침이나 반란은 누미디아 속주 총독이 다 뒷처리를 해준 꿀보직이기 때문이다. Notitia Dignitatum의 400년 기준으로 아카이아(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변), 아시아(에페수스 주변)와 더불어 3대 프로콘술 속주인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위상과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때 이름을 날린 지식인, 사업가, 부자 원로원 의원들 대부분이 이 동네 출신이었고, 팍스 로마나 시대 동안 이 지역 출신 상당수가 집정관, 법무관을 무수히 지낸 만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황제와 원로원 역시 이 속주의 주장을 많이 반영해 조세정책을 꾸렸다. 허나 이런 배경 때문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끝없는 세금 징세에 가장 불만이 컸고, 세금 부담율도 높아 가장 먼저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일이 벌어지고 이후에도 야심가들이 부유한 주민들과 연합해 여러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담으로 이 지역 출신들은 여타 다른 속주와 비교해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에 페니키아 특유의 발음과 억양이 있었는데, 로마나 이탈리아로 상경해도 다른 속주 출신들과 달리 평생동안 그 억양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include(틀:알제리의 역사)] * '''[[누미디아]] 속주(Provincia Numidia)'''[* 아프리카로부터 분화] ♠: 현재의 [[알제리]] 북부로, 지중해성 기후의 북부 해안을 제외한 알제리 땅의 대부분이 사막인 걸 감안하면 실제 알제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먼 훗날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유럽인들을 이주시켰을 때에도 이 지역에 대부분 정착했다.] 주도는 키르타. 오래 전 로마에 편입된 속주인데다, 서기 40년 북아프리카 경비와 방어를 담당하는 로마군이 배치된 역사를 가진 만큼 군사도로, 로마 식민지배를 담당한 여러 로마식 도시들이 밀집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개편 당시부터, '누미디아 동부 → 누미디아 서부 → 트리폴리타니아와 병합 후 아프리카 속주 편입 → 분리 후 아프리카 속주 휘하 속주로 재편입'의 복잡한 개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미디아 총독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기 193년 정식 분리시키기 전까지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밑에서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모양새를 띄었다. 이런 까닭에 해당 속주의 일에 다른 속주가 사실상 압박을 하거나, 반란이나 내란시 벌어질 위험성이 잠재된 지역으로 인식됐다. 이에 서기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유일무이한 북아프리카 군대를 가진 누미디아 속주를 아프리카 속주에서 정식으로 분할시킨 뒤 그 독립성을 보장해줬다. 이때 세베루스 황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누미디아 총독에게 이러저리 명령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이전까지도 황제가 파견한 누미디아 총독들은 야전사령관 경력을 가진 법률가 출신 원로원 의원들이 맡았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누미디아 총독은 전직 집정관 출신 중 권세가들이 파견된 아프리카 속주 총독 밑에서 군사 업무를 하는 부하격 총독인 모양새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양 속주가 합동으로 처리하는 사법, 행정 업무 중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누미디아 일에 개입한다거나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황제를 선언한 직후 제 부하를 후임자로 파견하는 등 볼썽사나운 일로 골머리를 앓는 자리였다.]] 아프리카와 함께 로마의 [[전투 코끼리]]를 책임져왔으며 누미디아 왕국은 2차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카르타고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자를 회유했고, 전쟁 이후 마시니사가 왕이 되어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는 종전 협정 결과로 카르타고가 독자적인 [[교전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을 이용하여 카르타고를 괴롭힌다. 이는 로마가 보기에도 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모든 로마 지식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욕한[* 심지어 2차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까지도 반대했다고 한다.] 3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한편 카르타고 멸망 약 반 세기 후에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가 [[오해]]와 [[실책]] 및 [[악수]]를 쌓은 끝에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를 [[유구르타 전쟁]]이라 부른다. 유구르타 전쟁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전쟁이었으며 유구르타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물론 유구르타는 처형되었고 영토 상당 부분은 이웃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구르타의 배다른 형제 [[가우다]]와 그의 아들 [[히엠프살 2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실정으로 본국에서 쫓겨난 히엠프살 2세를 [[폼페이우스]]가 복위시켜 주면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히엠프살의 아들 [[유바 1세]]는 로마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어 아프리카에 쳐들어온 카이사르파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전사시키는 실적을 올렸지만, 결국 직접 쳐들어온 카이사르에게 [[탑수스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했다.[* 폼페이우스파의 장군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누미디아는 주인을 잃고 이웃 마우레타니아 세력이 활개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가 복위되었지만 누미디아 대신 마우레타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누미디아는 속주화되었다. 제정 시대에 벌어진 인근 속주 주민 봉기나 속주총독들의 황제 참칭 사건이 벌어질 때, 투입된 병력이 이 속주 주둔 로마군이었다. *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Provincia Mauretania Caesariensis)''':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사이에 끼인 속주. 주도는 카이사리아(현 알제리 [[셰르셸]])이다. 여러 속주들에 카이세리, 카이사리아 등 이름이 비슷한 도시가 많은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또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카이사르 이후 황제들의 공식 이름에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들어갔으며 카이사르 자체가 황제를 뜻하게 되었기 때문. 이 카이사리아는 위의 유바 2세가 마우레타니아로 옮긴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수도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아비시니아(Abyssinia)''': 아비시니아 고원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에티오피아]] 일대이자 [[나일 강|청(靑)나일 강]][* 말 그대로 푸른 나일 강(The Blue Nile)이다. 나일 강의 가장 큰 두 개의 지류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우간다]]'''의 앨버트 호에서 발원하는 백(白)나일 강.]의 최상류지대이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서기 1000년경까지 존속하였던 '''[[악숨 왕국]]'''(The Kingdom of Aksum, The Kingdom of Axum 또는 Aksumite Empire) 및 악숨 왕국이 있었던 지역을 말한다. 악숨 왕국은 본래 에티오피아 북부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였으나, [[서력기원|기원 전후]]로 제국을 칭할 정도로 국력이 향상되었다. 제국을 칭하기 시작한 후, [[서력기원]] [[2세기]]에 이르면 [[로마]]와 [[파르티아]] 및 [[인도]]의 [[쿠샨 왕조]]와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군대를 이끌고 나일 강 상류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나일 강]] [[유람선]] [[여행]]'''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간 에티오피아는 아비시니아 고원이 있는 [[동아프리카|아프리카의 뿔]] 지방의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이 아닌, '''[[아스완]]이 있는 지방이자 현재의 상 이집트(나일 강 중상류의 이집트 남부 지방과 [[수단 공화국|수단]] 북부)인 누비아 지방(Nubia)'''[* 참고로 고대 이집트인은 누비아 지방을 카슈(Kash), [[구약성경]]에서는 쿠슈라고 불렀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우스]]가 구출한 공주 [[안드로메다]]가 속한 에티오피아가 "누비아 에티오피아"이다. 단,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왕]]과 [[지혜]]에 대한 [[대담]]을 나눈 [[시바의 여왕]]이 통치했던 에티오피아는 "누비아 에티오피아"가 아닌 "아비시니아 에티오피아" 맞다.]'''이다.''' 즉 기록이 '''혼동'''된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성향상, 이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오기보다는 외교로 해결했을 게 뻔하고~~ 하지만 "아비시니아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은 이집트 및 [[홍해]]를 통해 로마로부터 [[의류]] 및 [[유리]]제품을 [[수입]]하였고 [[상아]], [[노예]], [[흑요석]], [[대모]], [[산호]], [[금]] 등을 [[수출]]하는 [[무역]]을 왕성하게 했으며, [[서력기원]] [[4세기]]경에는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전해져 [[프레스터 존의 전설]]의 원형의 후보 중 하나가 된다. 이 악숨 왕국은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동로마]]와 [[사산 왕조]]와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해서 서기 [[10세기]]에 멸망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그리스어로 "햇볕에 그을린 남자들의 땅"이라는 뜻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