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권/평가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불안정한 가업을 안정시킨 최고의 후계자이자 군주.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이다. 사실 손권은 [[손책]]이 죽고 그 지위를 승계한 시점에서 고작 '''18세 소년'''에 불과한 '''[[소년소녀가장|소년군주]]'''였고, [[적벽대전]]을 맞이했을 때도 약관 '''26세의 젊은이'''였다. 군주의 나이가 이렇게 어리면 치세일 때도 문제가 일어나기 쉬운데,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약점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막 후계자로 등극한 시점에서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명분 부족'''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손권이 집권할 당시의 이 명분 부족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일단 손권의 지위는 형인 [[손책]]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생전 손책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토역장군(討逆將軍) · 회계태수(會稽太守) · 오후(吳侯)였는데, 세습이 가능한 지위인 오후 작위는 손책에게 아들인 [[손소#s-1|손소(孫紹)]]가 있는 이상 손책이 이를 습작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조조에게 세력 승계를 인정받아 공식적으로 토로장군(討虜將軍)·영회계태수로 임명되었으나, 생전에 손책이 구축해두었던 강동의 통치권이라는 것을 공식적인 지위로 내세울 수단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생전의 손책은 친족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강동 지방의 군현을 임의로 분할하여 손가의 집권 체계를 만들었다. 이때, [[오경(삼국지)|오경]][* 손견의 부인 [[무열황후 오씨]]의 남동생.]을 단양태수로, 사촌형 [[손분]]을 예장(豫章)태수, 손분의 아우 [[손보]](孫輔)를 여릉태수로 삼고, [[주치(삼국지)|주치]][* 손견의 부하](朱治)를 오군태수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들을 통솔하는 공적인 지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저 손책에게 임의로 태수에 임명된 손가 일족, 가신들과의 사적인 연결에 의지하는 취약한 체계로서,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진 태수들을 단순히 손책이 손가의 수장이라는 사적인 권위만으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는 언제 누가 배반해서 세력이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손권은 이 취약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심지어 손가 내에서조차 손권의 권위는 완전히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손권은 15살 양성현장으로 있을 당시 양성현의 관고에서 공금을 횡령해서 부하 [[주곡]]이 장부를 조작해 손권을 비호해줬고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손책이 원정을 나간 사이 천명도 안되는 군사로 진영을 지키다가 적군에게 기습을 받았고 주태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손권을 구해내기까지 했다. 이런 면을 보여줬는데 손책의 가신들이 그를 마뜩치 않게 보는 것도 솔직히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서는 [[주태]]가 천한 신분임에도 중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는데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주었는데 무시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것이다. 손책이 직접 유언을 남겼기에 세력을 계승할 수 있던 손권이었지만, 그 위치는 불안했다. 손책이 구축한 체제는 손책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간신히 봉합되어 있는 틈이 많은 체제였고 손권은 실력으로 휘하의 태수들을 제압하면서 성장해야 했다. 대호족들이 손책의 정책에 반발을 가졌어도 오의 군권을 비롯한 많은 실권들은 손책의 심복인 [[주유]]와 [[장소(삼국지)|장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가 없을경우 손권은 대권을 이어받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을 정도. 손권이 그 전에 많은 전공을 세워서 자신의 입지가 강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여강 공략전에서 원술의 잔여 세력인 유훈을 격파하고 황조군을 격파했지만 이는 대부분 손책과 주유가 모든 판을 짜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이 시절 주유, 장소 둘 중 하나만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손권은 그냥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일단 장소 자신도 후계자로 손권의 동생 [[손익]]을 추천했는데다가, 나이가 어리는 해도 손책의 장자 [[손소#s-1|손소(孫紹)]]가 있었으니 이는 손가 내에서도 껄끄럽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래서 손권이 주유와 장소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지만 그의 위세는 매우 약했다. 심지어 후계구도가 꼬였다던가 파벌이 나뉘어져 싸우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손책이 사적으로 임명한 여릉태수 겸 교주자사인 손권의 사촌형 [[손보]](孫輔)는 공식적으로 평남장군으로 임명된 인물로, 손권과 공적인 지위가 같았다. 손보는 실제로 문제를 일으켰는데, 손권이 뒤를 이은 뒤 얼마 안 되어 조조와 내통하여 항복하려다가 손권이 직접 음모를 제압해야 했다.[* 이때 손권이 보여준 단호하고 빠른 대처는 세력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영민한 행동이었다. [[원상]]이 혈육의 정 때문에 [[원담]]을 봐주다가 결국 패망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걸 생각해보자.] 그 뒤에는 바로 [[이술]]이 손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손권은 뒤를 잇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숙청해야 했다. 이술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여강군은 이술을 따르고 있던 군소군벌들이 할거하는 상태가 되어 손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버렸고, 후일 적벽 당시에도 여전해서 이곳의 수많은 백성들이 뇌서의 지휘하에 뜬금없이 형주에 있던 유비한테 귀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손권이 직접 토벌하면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반란은 차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져 강하를 손에 넣기 직전에도 심한 반란 때문에 퇴각했고, 항상 반란 문제 때문에 일부 병력을 본국에 주둔시켜야 했다. 이는 [[적벽대전]]이나 이후의 원정때도 반복된다. 손권은 적벽 당시 자기가 100,000명을 제어하여 들어바칠수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나마 주유가 요구한 50,000명도 들어주지 못하고 30,000명 모았을 뿐더러 그중 10,000명은 중군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당연히 이는 [[천자]]를 끼고 조정의 권위를 장악한 조조에게는 도저히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손가의 사적인 연결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손권의 지배에 정당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대인들은 "별로 없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정에서 인정한 손권의 권위는 일개 잡호장군이며, 회계태수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조조가 공격해오자 항복론이 급격히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손가 내부조차 흔들렸는데 속관들은 [[장소(삼국지)|장소]]마저도 항복론으로 기울 정도로 동요가 극심했다. [[유표]] 사후 구심점을 잃고 맥없이 항복한 유표의 형주 세력처럼 손가도 공중분해 될 위험이 컸다. 유표는 죽기 직전에 조정에 표문을 올려 [[유비]]에게 형주목 지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는 당사자인 유비도 모르는 사실이었고 [[채모]] 등은 유표가 죽자마자 [[유종]]을 후사로 내세우고 곧바로 [[조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유종과는 적대적인 유표의 적장자 [[유기]]가 강하태수 지위를 유지하며 생존 중이었고, 유비는 남하하여 남군 이남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손책 사후의 상황도 사실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좌장군(左將軍) 예주목(豫州牧)이라는 거물급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유비는 헌제의 밀서를 명분으로 하여, 조조가 가진 '''협천자'''의 명분을 일전시켜 조조를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농락하는 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하고 명분을 함께함으로서 이 적벽 대전에서 손오 세력의 구심점을 잡는데 성공한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車騎將軍)의 지위를 칭함으로서 손오 정권은 이전처럼 동등한 지위의 태수들을 손가의 사적인 인간 관계로 다스리는 모호한 형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 손권은 유비, 조조의 공격을 격파하고, 형남을 병탄하고 사섭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늘렸다. 이 과정에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탄탄해졌고, [[조비]]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오왕(吳王)에 봉해진 것은 이미 확고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촉, 위의 공격을 격퇴한 이후 손권의 권위는 안정기에 들어갔다. 손권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조비는 손권을 오왕에서 폐위하였으나, 손권은 태연하게 오왕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국내에서도 이미 손권의 지도력은 확고하게 인정받아 반발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시점에서 손권의 오나라는 후한이나, 그를 선양한 위나라의 명분론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존속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게다가 조비가 무리하게 손권을 공격하다가 연전연패하면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크게 올라갔다. 또 건업(建業)의 개발과 수도 이전, 황무(黃武) 연호의 개원과 유홍(劉洪)이 만든 건상력(乾象歷)의 도입으로 독자성을 더욱 강화한다. 연호를 제정하고 역법을 만든 것은 황제의 통치 행위이므로, 왕호를 칭하고 있기는 하나 그 권위는 황제와 다름 없는 [[외왕내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229년, 정식으로 [[황제]]가 됨으로서 손권은 단순한 호족 군벌 집단을 하나의 독립된 왕조까지 발전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래도 일단 형 손책과 그의 아들로 인해 생긴 명분 문제에는 뒤끝이 있었는지 형과 아들을 왕에만 추존하고 그치는데 진수가 이를 손파토로전 평에서 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손권은 같은 시대의 [[원상]], [[유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힘든 불안정한 지위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능력으로 이를 모두 극복하고 황제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조조가 그를 원소와 유표의 아들들과 비교해서 고평가한것은 이런 핵심 요소를 꿰뚫은 평가였던것. 손권이 수성형 군주라고 저평가 받긴 하지만 한 인간의 왕권 통치 기간이 50년 이상 넘는다면 어느 방향으로든지 정치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툭하면 서로 죽고 죽이고 배신하는 난세 속에서 권모술수와 정치의 달인이 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