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권/평가 (문단 편집) == 군사 == 손권의 군사 능력은 공격과 방어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공격 쪽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게 중론이다. 위나라 방면의 공격으로 환성의 주광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 그가 이루어낸 몇 안 되는 완승 중 하나다. 손권이 스스로 정벌에 나섰을 때는 장제에게 속아서 처참하게 도망쳤고, [[장료]]와 [[장패]] 그리고 강하의 [[문빙]]과 합비 신성의 [[만총]] 같은 용병에 능한 장수들에게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그가 친정을 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적장들은 이술, 황조, 주광, 서씨가 주도자를 죽인 규람, 대원의 잔당인 마와 보의 도적 때, 또는 왕릉이 만총의 만류에 지원도 없이 대충 보낸 이름 없는 독장과 같이 평범한 무장이었거나 용병을 모르는 일개 싸움꾼들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오나라는 남군, 강릉을 차지했음에도 결국 자신들이 소유할 역량이 안 되어 [[유비]]한테 넘겨야 했다. 수없는 [[위-오 전쟁|합비 방면 진출]]은 그의 대표적인 실패들이다. 합비 쪽은 있는대로 박살나는 상황이라 [[적벽대전]] 이후 조조를 잡는 데 실패해서 조조가 세력을 회복하고, 유비가 파촉으로 진출하는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 [[형주 공방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회수 일대 확보[* 얼핏 생각하면 장강만 잘 지키고 있으면 건업 방어는 문제 없는거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장강으로 적이 도하하기 위한 맞은편 회수 일대 교두보를 가지고 있는게 훨씬 위험 부담과 비용이 낮다. 다만 유수오로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하긴 했고, 광릉 일대는 무인지대였으며, 여강 쪽의 장강 변은 손권이 장악했기 때문에 위군의 도하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다.]를 끝끝내 실패한 [[육조시대]]의 국가는 [[오(삼국시대)|오]]가 유일하다. [[손견]]은 (아무리 원술이 사재를 탈탈 털어 줬다지만) 동탁 휘하의 서량기병을 이겼었고, 한나라의 최정예에 해당할 중앙군의 일원으로 서량 쪽 변장과 한수 토벌에도 참여해봤고, [[손책]]이 강동 평정한 것과 [[주유]]가 평지에서 [[조인]]이랑 대등하게 싸운 걸 보면 형 세대까지는 전술적 노하우가 전수된 거 같긴 한데 이런 걸 보면 손권 본인의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수성을 비롯한 방어 전술에서는 상당한 능력을 보였다. [[유수구 전투]] 당시 그는 전황을 유리하지도 혹은 불리하지도 않게 유지하여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결국 [[조조]]를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하여 조조는 손권의 군세를 멀리서 보고는 "손권같은 아들을 가져야 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부족한 용병술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출신이 좋아 어려서부터 고등 교육을 받고 또 실전에서도 뛰어난 용병술을 보인 조조나 그를 따랐던 수장들, 대학사 노식에게 사사하는 등 고등교육을 받고 [[공손찬]]의 뒷배도 받는 등 현장에서 용병술을 익힌 [[유비]], 타고난 파이터라 싸움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아버지 [[손견]]과[* 물론 일개 장수로서는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안목이 필요한 사령관으로서 능력은 검증받은 적이 없다.] 어린 나이부터 [[원술]]의 밑에서 종군한 형 [[손책]]과는 달리, 손권은 아버지와 형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강동의 군주가 되고나서는 정치에 역량을 집중하였기에 군사 방면으로 경험을 쌓을 일이 없었다. 또 다른 원인은 오라는 나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있었는데, [[오(삼국시대)|오나라]]의 병력 체계는 [[촉한|촉]]이나 [[위(삼국시대)|위나라]]와 달리 [[세병제|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였다는 것이다. 병호를 따로 할당해서 병역을 부과하는 세병제 자체는 삼국 모두 실행했지만, 오에서는 이 병호를 [[식읍]]처럼 신하들에게 분배하여 평시에도 병호를 부려 농지 개간 등에 노동력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런 방식은 사실상 [[호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병]]을 부릴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위와 촉한도 호족연합이라서 중앙권력이 중국의 다른 왕조보다 약하지만 오는 태생이 지방군벌과 지방 호족끼리 할거해서 분할한 특성상 중앙의 권위나 정통성이 한의 계승이라는 프레임을 가진 위, 촉한보다 떨어졌고, 그 탓에 오의 중앙 정부는 호족들에게 특혜 따위를 부여해야만 했던 것이다. 손권이 모든 군권을 가지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체계가 아니라 손권은 호족들의 동의하에 세워진 우두머리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지휘 체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군비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호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중앙 정부로써는 곤란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전투 중에 부하 장수가 싸움을 거절하면 대안이 없는 지휘 체제였다. 위나 촉한의 경우에은 부하 장수가 전투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중앙 정부는 이를 군율로 다스리면 됐지만, 오나라는 군권을 각 호족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손권이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이런 어수선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나마 우두머리인 손권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지휘체계가 통일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