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권/평가 (문단 편집) === 애매한 부분 === 다만 호족의 복속, 유비와의 동맹 성사 등을 무조건 손권의 공이라고 보기엔 반론의 여지가 있다. 당장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적벽 대전까지 손가 정권의 실질적인 실권자는 주유나 장소였다. 우선 손씨가 손책의 적자인 손소와 장소의 지지를 받은 손익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손권으로 후계자가 결정되어 빠르게 결속할 수 있었던 것은 손책이 장소에게 "손권이 제대로 못 하면 그대가 취하라."라고 말했듯이(장소전), 손책의 죽음을 앞두고 중신들 앞에서 손권을 직접적으로 지명하는 절차가 있었고 손책의 가까운 친족들 중 손권 외의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손권의 승계나 호족의 복속은 위에서도 나와 있듯이, '''손권의 능력보다는 전적으로 주유와 장소의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조조 진영 안에서는 진등이 강동 병합론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조조 진영 내부에 강동 병합론의 여론이 존재하고, 손권의 지배가 아직 확고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술, 손보가 조조에게 투항했을 때, 혹은 손권이 성헌을 살해했을때, 그도 아니면 규람과 대원이 유복에게 투항했을때 조조가 개입을 시도했다면 손권이 막아낼 수 있을지의 여부는 회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조는 손권에게 토로 장군의 작위를 내리고 이술,손보 등 손씨 진영 내 반란 세력의 개입 요구도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며, 203년엔 서평에 주둔하며 유표와 전면전 직전까지 대치했고, 별도로 장료를 손권-유표 접경 지대인 강하에 보내 여러 현들을 공략하는 등 오히려 손권의 가장 큰 외부 위협 요인이 될 유표를 강력하게 압박한다, 즉 손권의 초창기에는 '''손권의 능력보다는 조조의 무관심이 손권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벽지에 가까웠던 강남 지역에서 중앙 정부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기에, 명분없는 침략 → 영토 확장의 연속이었던 손책의 행보가 가능했으며 손책을 중심으로 하는 사적인 결속체인 손씨 세력이 성립될 수 있었고, 이후 별 다른 명분의 부재에도 무리없이 황제국 체제로 삼국정립이 가능하게 했으나 한편으로 손권 초기 이술, 손보의 반기는 물론 손권의 심우, 성헌 주살 사건이나 적벽 대전 당시 장소 정도의 거물이 항복파에 선 것은 손씨 내부에서 중앙 조정 내지는 중앙 조정을 장악한 조조와의 대립이 무의미하며 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인식 또한 적벽 대전 이전까지 손가 중심의 패권, 혹은 지역주의 성향과 팽팽하게 맞섰음을 보여준다. 적벽 대전 자체도 손권 본인이 항전하자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던 상황에서 주유가 결정하자 다른 이들이 따른 사항이고 유비와의 동맹 역시 노숙의 역할이 지대했다. 손권은 유비라는 강력한 반조조 세력의 구심점이 없었다면 애당초 적벽 대전에서 '''조정을 겁박하는 역적 조조에 맞서 강동의 안녕을 지키는''' 프레임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