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봉전쟁 (문단 편집) === 5.30 사건과 반봉동맹의 결성 ===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였고 조계지 당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봉천군벌은 상하이에 주둔한 20사단장 형사렴을 6월 13일 상하이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상하이 시내에 군부대를 진주시켜 치안을 유지하게 했고 [[장덩쉬안]]과 정희춘이 각각 1개 여단을 보내 도왔다. 상하이에 봉군이 증강되자 쑨촨팡은 봉천군벌이 강소성 다음에는 절강성을 노릴지 모른다 여겨 강소독군 양위팅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전술했듯이 양위팅은 매우 오만불손한 태도로 쑨촨팡의 제안을 무시하여 쑨촨팡으로 하여금 오히려 위협을 느끼게 하여 봉천군벌에 반기를 들게 하였다. 이후 봉군은 상하이 시내에서 마약을 매매하고 약탈, 사기, 공갈, 강간 등의 각종 대민범죄를 자행했다. 이에 상하이와 난징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봉군의 만행에 항의하는 민원과 시위를 벌였지만 양위팅은 안하무인으로 성난 민심을 무시했다. 봉천군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자 쑨촨팡은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천댜오위안, 백보산, 마옥산을 비롯한 강소군의 장령들 및 호북, 안휘, 강서성의 군인들과 결탁하여 봉천군벌을 치자는 계획을 꾸몄다. 이에 관해 장쭤린에게 보고가 들어갔지만 장쭤린은 밀고한 사람을 욕하며 정보를 믿지 않았다. >"망할 놈! 35년 동안 난 누굴 치지 않았으니 절대로 누가 날 치진 않을 것이다!" 장쭤린이 방심한 사이에 쑨촨팡은 자신의 막료 양문개를 [[펑위샹]]에게 파견했다. 펑위샹 역시 북경정변 이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고 장쭤린이 힘을 믿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쑨촨팡이 펑위샹을 형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하며 자신의 가계를 적은 란보를 보내오자 반색하며 쑨촨팡과 의형제를 맺었다. 양문개는 펑위샹의 대표 단기주를 데리고 항저우로 돌아와 펑위샹이 가세했음을 알렸고 쑨촨팡은 크게 기뻐했다. 쑨촨팡은 또한 하남독판 악유준을 만나 합작을 타진했고 이에 악유준은 휘하의 국민군 제2군을 동원해 가세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7일, 쑨촨팡은 항저우에서 안휘, 강서, 복건, 절강, 강서 등 5개 성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열고 봉군 토벌 계획을 상의했다. 대표들은 쑨촨팡을오성연군 총사령관으로, 주음인을 부사령관으로 추대한 다음에 10월 10일에 검열을 핑계로 강소와 절강 사이의 태호에 병력을 집결시켜 거병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