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봉전쟁 (문단 편집) === [[반봉사건]] === 사태가 다급해지자 장쭤린은 일본 외유를 떠났던 명장 [[궈쑹링]]에게 귀국을 촉구하는 한편 의견을 모았다. 양위팅 등 주전론자들은 일단 진격을 멈춘 쑨촨팡보다는 북방의 펑위샹을 제압하여 북방을 안정시킨 후에 다시 남방으로 진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쭤린은 동북군을 6개 방면군으로 개편하여 [[리징린]]을 1방면군단장, [[장쭝창]]을 2방면군단장, [[장쉐량]]을 3방면군단장, [[장덩쉬안]]을 4방면군단장, [[장쭤샹]]을 5방면군단장, [[우쥔성]]을 6방면군단장에 임명하게 했다. 그런데 이중에서 제일 비대한 것이 3,4 방면군의 부대로 3방면군 부군단장 궈쑹링이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10월 22일 궈쑹링은 장쭤린의 간곡한 청에 귀국하였다. 3,4방면군은 텐진 남북철로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10월 24일 궈쑹링은 3방면군 사령부를 조직하기 위해 텐진으로 갔다. 장쭤린은 펑위샹이 쑨촨팡에 가담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11월 상순에 베이징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펑위샹과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장쭤린은 [[궈쑹링]]과 [[리징린]]에게 국민군 공격 준비를 갖추어 협상결렬에 대비했으나 궈쑹링은 보경안민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궈쑹링은 남방진출에 명분이 없다고 주장하며 보경안민할 것을 주장했으나 장쭤린은 남진을 주장하는 양위팅의 의견만 수용하여 궈쑹링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 결국 궈쑹링은 장쭤린 하야를 요구하며 [[반봉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 제국]]과 [[관동군]]이 장쭤린을 지원하면서 패배하고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총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