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부인 (문단 편집) === 생애 ===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은 재주가 날래고 성품이 굳세며 사나워서 여러 오라버니들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법정전) 유표의 아들 [[유기(삼국지)|유기]]가 병사하고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되자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서 여동생을 유비에게 바쳐서 동맹을 강화했다. (선주전) 손부인이 유비와 결혼한 시기는 209년 12월이었다. (자치통감) 손부인의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버지 손견이 192년에 죽었고 오빠 손권이 182년에 태어났으니 손부인은 당시 18~27세였다.[* 27살까지 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노처녀로 남아있을 리가 없고 아마 20세 전후로 혼기가 찬 김에 손권이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손부인의 남편이 되는 유비는 무려 49세였다. 이에 대해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은 건안 14년에, 유비의 나이는 49세고, 손권은 28세, 그의 여동생은 대략 20여 세니, 거의 50의 늙은이에게 시집간 것으로[* 참고로 유비는 손권 및 손부인의 아버지인 손견과 겨우 5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즉 손부인에게 유비는 아버지뻘인 아저씨라는 셈이다.], 사서의 글에선 "여동생을 바쳐 우호를 굳혔다."(進妹固好)라 했으니, 네 글자로 크게 희롱할 만했다고 했다. 손권이 세력이 커진 유비가 두려운 나머지 꽃다운 나이의 여동생을 바쳤다며 비꼰 것이다. 다만 여동생을 바쳐서 우호를 다졌다느니 라는식의 글은 촉나라 사람이었던 진수의 사감이 들어간 촉서 쪽의 기록에서 보이는 표현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대 유비는 손권의 군대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입장으로, 유비와 손권의 파워밸런스는 명백히 손권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사에서 [[유비]]는 손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손권군까지 다녀오지 않았고 손부인이 유비군으로 보내졌다. 유비는 형주 석수현 서남쪽의 수림산에서 손부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비단막이 숲 같아서, 이름지어졌다, 또한 유랑포(劉郎浦)는 석수현 서북쪽에 있으니, 일명 유랑복(劉郎洑)이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일통지) 석수현의 나루터에 유랑포가 있으니, 촉선주가 오의 여인에게 장가든 곳이다.(자치통감 호삼성주) 유비는 손부인과 결혼한 후, 손권에게 형주를 대여하기 위해서 경구에 다녀왔다. (자치통감) 당시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를 붙잡아두라는 계책을 진언했다. (주유전) 그러니까 정사에서는 유비가 손부인과 결혼했던 시기와 [[주유]]가 [[유비]]를 붙잡아두려는 계책을 진언했던 시기가 다르다. 손부인은 시녀 백여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게 하여 늘 자신의 주변에서 시립하고 있게 했고 유비는 내실로 들어갈 때마다 늘 마음 속으로 두려움을 가졌다. (법정전) 특히 유비도 침소에서는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으니, 손부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손부인은 혼인 후에도 무장한 시녀들을 사병처럼 대동하며 '나는 유비를 존중하는 시늉도 안 할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무력 시위를 한 셈이었다. 게다가 손부인은 교만하고 횡포해서 [[오(삼국시대)|오나라]]에서 데려온 관리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마구 법을 위반했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제갈량]]이 말하길 [[유비]]는 공안에 있을 당시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했다. (법정전) 이러다보니 [[법정(삼국지)|법정]]이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라고 권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손부인은 잔릉현의 고성을 보수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역주) 손부인은 유비와 서로 믿지 않아서 잔릉현성 동쪽 5리에 손부인성을 쌓아 따로 여기에서 거주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원화지) 당시 유비의 본거지가 공안이었고 손부인성은 공안현 서쪽에 있었다. (삼국지집해 선주전 인용 일통지) 이 정도면 말이 부부지, 손부인이 오나라의 병사와 관리를 동원해 유비를 감시하는 수준이었다. 유비는 익주로 들어가면서 손부인이 혹시 깽판을 칠까 봐 걱정했지만 조운을 신뢰했기 때문에 [[조운]]에게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나서 익주로 떠났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유비가 입촉하던 시기에 손권은 손부인에게 사자를 보내 다시 오로 돌아오도록 했다. (목황후전 주석 한진춘추) 정사에서 손권은 손부인에게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거짓 편지 같은 것은 보내지도 않았다. 손부인은 그냥 손권이 오로 돌아오라고 배를 보내자 곧장 유비를 떠났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하지만 문제는 손부인이 오로 돌아가면서 유비의 아들 유선도 같이 데리고 가려고 했던것이다. 정사에서는 손부인이 유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 나와있지 않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조운에 명해 장강을 봉쇄해서 유선을 구출하게 했다. (목황후전 주석 한진춘추) 조운은 장비와 함께 군사를 데리고 가서 강을 가로막아 유선을 구출해서 돌아왔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손부인이 유비와 결혼한 시기는 209년 12월, 유비가 입촉한 시기는 211년이다. (자치통감) 그러니까 손부인과 유비의 결혼 기간은 겨우 2년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유비는 익주를 평정하고 나서 손부인이 오나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목황후]]와 재혼했다. 유비는 목황후와의 재혼을 고민하면서 목황후의 죽은 전남편 [[유모]]가 자신과 동족이라는 것만 고려했고 손부인의 존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목황후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