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원일 (문단 편집) ===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 >1945년 8월 21일, 해방병단 모집을 위해 서울에 붙인 벽보[[https://fb.watch/3OmHQ3HWMW/|#]] 중국유학, 독일 상선사관으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강대국]]의 [[해군력]]을 두눈으로 실감한 손원일은,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1월 11일[* "해군은 신사(士)다."라는 뜻에서 11(十一)월 11일 11시에 해방병단 결단식 거행]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이후 해방병단(海防兵團)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 시절에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구 [[일본군]]이 쓰다가 버린 소형 목선 몇 척이 전부였을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을 수리하고 [[미 해군]]에게서 [[소해정]]을 인수하는 등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http://cheonji.egloos.com/4992547|창군 당시 손원일 제독의 군함 도입 일화.]] 그후 1948년 9월 5일에 조선해안경비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손원일 대령은 그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당시에는 해군총참모장.]이 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손원일 준장은 이응준·채병덕·김홍일과 함께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기도 했다. 여순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당시 해군 장교였던 [[신현준(군인)|신현준]] [[소령]]이 해군본부에 "우리도 [[해군 육전대]] 같은 상륙부대가 있었으면 바다를 통해 진압병력을 빠르게 기동시켜서 일이 커지기 전인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를 설득력 있다고 판단한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창설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고 건의한 인물인 신현준 [[장군]]은 해군본부의 창설 허가가 나자 해병대 창설을 직접 맡아서 주도했고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되어 [[중장]]으로 예편했다. 위에 소개된 링크글에도 나오듯이, 손 제독은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도입할 당시에도 직접 나서서 성사시킨 바 있다. 그리고 백두산함은 6.25 발발 당시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또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 최고 사령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제독]]'''으로 [[미국]]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 일색이었던 해병대나 육군의 지휘관들과는 달리, 해군의 참모총장들은 일본군 출신이 없다. 손원일 제독이 일본군 출신을 배제하려 해서는 '''아니고''',[* 손제독은 해병대 창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해병대도 해군과 다름없이 자식처럼 여겼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해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출신들을 받아들인 육군과 다르게[* 조선인 같은 경우 [[1939년]] 후반까지 가서야 일본육군에 처음 '''지원'''이 가능해졌다.(그에 반해 모든 [[일본인]]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역의 의무를 부여받았다.)] 불신과 자부심등으로 조선인들을 끝까지 징병하지 않았고 당연히 [[해군병학교]] 및 승선 직별 대상자에서도 제외됐으며 자진 지원자들에 한해서 조차도 육상 근무만 겨우 시켰기에[* 따라서 '일제강점기때 해군으로 끌려가 배타고 싸웠다'는 주장을 하면, 그 신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일본 해군 출신 병과[* 일본 해군에서 병과란 항해, 포술, 수뢰, 항공 등을 맡는 전투병과의 일종으로, 일본 해군에는 전투병과란 병과 단 하나뿐이었다. 항공과가 따로 있었으나, 이는 [[사병]] 출신 사관인 특무사관들 중 항공 계열인 이들에게만 붙었다. 해군에서 기관과, 군의과, 법무과, 기술과, 주계과 등 병과가 아닌 사관들은 비병과사관이라는 용어를 썼다.]사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해군본부에서 발간한 《6.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는 창설 멤버 중 해군병학교 출신 병과 [[중령|중좌]]가 한 명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 내지인 신분을 획득해 입학한 특이 케이스다. 대신 이들은 만주군 육군 출신들과 함께 신규 창설한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그래서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이 모두 만주군 육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해병대 내무생활 문화에 일본군 잔재가 짙게 남게 되고 해군을 이끄는 항해장교단은 한동안 상선사관 출신 제독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일부에서 '일본군 출신이 없는 해군만이 정통성이 있고, 나머지 군종은 친일 후예'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는 손원일 제독 본인을 포함한 창설 당시 해군 수뇌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충원할 수 있었던 인력의 구성을 반영한 결과론일 뿐이다.[* 공군의 경우만 봐도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2대 참모총장이자 앞서 초대 국방차관이었던 [[최용덕]]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김신(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아들)을 비롯한 다른 광복군 출신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미 공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미 공군 색깔이 강하다. 게다가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시정부의 국방장관격인 노백린이 공군력 건설에 착수한 바 있다.] 게다가 손원일은 건군 및 6.25 전쟁 초기에 육군과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김정렬(둘다 일본군 출신)과 '육해공 삼형제'라고 부르며 평생 의형제 관계를 유지했다.[* 출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편찬한 손원일 제독 평전.] 이런 점을 보면 '해군 빼고는 친일파 후예'라는 작금의 주장은 손 제독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손 제독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점이 해군에게 있어 상당한 메리트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