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자병법 (문단 편집) == 편찬사 == [[춘추시대]] [[오(춘추시대)|오]]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13편이 저술되었으나 전국시대를 거쳐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필사되다보니 후대 사람들이 가필, 첨삭하면서 다양하게 중복, 수집되어 서한 초기 [[무제(전한)|한무제]], [[성제(전한)|한성제]] 시기에 선진시대의 대대적인 문헌의 수집, 감수, 목록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유향]]이 82편의 《오손자병법》(吳孫子兵法)으로 정리하였다. 삼국시대 [[조조]]가 이를 다시 3권 13편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달아 《손자약해》(孫子略解)를 저술했는데 보통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로 알려져있다.[* 조조는 《속손자약해》도 저술했고 [[왕릉(삼국지)|왕릉]]과 함께 《손자병법》도 저술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왕릉과 함께한 《손자병법》은 손빈의 손자병법인 [[손빈병법]]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대에 [[가후]], [[심우]] 등이 손자병법의 주석을 저술했다고 한다.] 조조 이후로도 많은 주석본이 나왔는데, 중국에서는 한나라 조조, 당나라의 [[두우]](杜佑), [[두목]](杜牧), 이전(李筌), 진호(陳皥), 맹씨(孟氏), 가림(賈林), 송나라 시대의 장예(張預), 매요신(梅堯臣), 왕석(王晢), 하씨(何氏) 등으로 알려지거나 추측되는 열한명 이상의 주석가를 거론하여 송대에 길천보(吉天保) 편찬으로 유래하는 십가주(十家注) 손자병법 및 이후에 이를 추가하여 편찬한 십일가주(十一家注) 손자병법이 편찬되었다. 한국에서는 [[세조(조선)|수양대군]]이 최초로 손자병법에 주석을 저술한 [[무경칠서주해]]를 편찬하였다. 지금 민간에서 읽을 수 있는 손자병법의 이름을 단 책들은 모두 다 위무주손자.[* 정확히는 현재의 모든 손자병법이 위무주손자 원본인 게 아니고 위무주손자를 기본 판본으로 하여 조조가 주석을 단 내용은 빼고 손자병법 원전만 갈무리하여 펴내거나, 거기에 현대의 저작자가 개인의 주석이나 해석을 단 것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현재 손자병법이란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원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인 것이고, 이 위무주손자 원문 그대로 출판되는 경우는 도리어 드물다.][* 국내판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손자병법의 조조 주석판으로는 조조병법(유동환 저, 바다출판사, 1999)이 있다. 물론 이조차도 절판되었으므로 구하기 위해서는 중고판매 루트를 뒤져보거나 오래된 서점의 한 켠에서 보물찾기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2000년에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무경십서 1권-손자병법, 오자병법에 조조의 주석이 들어가있다. 옮긴이 신동준이 조조가 사실상 손자병법 저술자라는 견해라 조조 주석을 번역해 달았다고 한다.] [[조조]]는 주석에 "내가 수많은 병서를 읽어봤는데 《손자병법》만이 가장 심오하다"라고 평했다. 흔히 13편이 전부라고 알기 쉬우나, 다양한 상황에서의 용병술까지 포함한 82편이 과거에 있었다.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손자병법(오손자/吳孫子)이 82편, 손빈병법(제손자/齊孫子)이 8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2년 4월 중국 산동성 은작산에서 발굴된 한나라묘 2기에서 손자병법 13편과 손빈병법 30편이 죽간 형태로 발견되어 당시까지 손자와 손빈,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에 대해 중국 역사학자들 간의 오랜 대립이 끝나게 되었다. [[1996년]] 중국 시안에서 발굴되어 실제 손자병법의 내용을 알 길이 생기나 했으나,[[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1900329101013&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9-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5887&publishType=00010|출처]] 진위여부를 조사를 해보니 위작으로 드러나서 좋다 말았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50020911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1-05&officeId=00020&pageNo=12&printNo=23358&publishType=00010|출처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400329106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1-04&officeId=00032&pageNo=6&printNo=15927&publishType=00010|출처2]] 손자병법 13편만이 남은 이유는 시대가 지나 이미 전쟁양상이 크게 달라져서 손자병법 82편은 적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당시 오나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을 것이므로 각론에 등장하는 공성무기 제원이라든가 전차운용법[* 거듭된 품종 개량으로 군마의 크기가 커지면서 기병이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전차는 도태되었다.] 따위를 타국이나 후대의 장수들이 읽고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즉, 없어진 부분에 뭔가 대단한 원리가 들어있다기 보다는 춘추시대 전쟁양상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클 것이다.[* 혹은 단순히 중복 기록이나 후대의 위작, 첨가부분을 삭제한 것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활자 없이 죽간에 필사로 이어져 온 책인데다 손자의 명성에 슬쩍 자신의 글을 넣어두고 싶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