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전정 (문단 편집) == 생애 == [[1593년]] 산서성 대현(現 [[신저우시]]의 일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고, 말타기를 즐겼다고 한다. [[1616년]] 과거에 합격한 후, 진사가 되어 영성 지현에 부임했다. 이후 [[1621년]]에 이부의 험봉주사가 되었고, 그 뒤에 궁궐 사무를 맡는 낭중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때 환관 세력의 수장인 [[위충현]]과의 불화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1635년]] 다시 낭중에 복직하여 출사했다. 하지만 이때의 명나라는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거에 합격한 것에서 보듯이 원래 문관이었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뛰어난 [[문무겸비]]의 인재여서 곧 장수로 선발된 후 반란군 진압을 지휘하게 되었다. [[1636년]] 농민반란이 가장 심각했던 섬서성을 평정하기 위해 섬서순무에 임명되어 병부상서 [[홍승주]]와 함께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반란군의 수괴인 고영상이 [[자오곡 대책|자오곡]]을 통해 [[장안]]을 야습하려고 하는 것을 미리 간파하여, 자오곡에 대군을 매복했다가 4일 동안의 격전 끝에 반란군을 섬멸하고 고영상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것으로 반란군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나머지 잔당들은 [[이자성]]이 지휘하게 되었다. [[1638년]] 다시 홍승주와 손전정은 협공으로 이자성을 섬멸하려고 하지만, 이자성은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피했으며, 마침 [[청나라|청]]군이 침입해왔기 때문에 명군은 농민군을 박멸하지 못한채 만리장성으로 주력을 옮기게 되었다. [[1639년]] 조정의 다른 고관인 양사창의 모함을 받아 [[숭정제]]의 명령에 의해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그 틈에 이자성군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1642년]]에는 [[카이펑|개봉부]]까지 함락시켰다. 그 와중에 [[홍승주]]는 [[송산 전투]]에서 참패해 청나라의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귀순하여 편을 바꾸었다. 이렇게 되자 숭정제는 다시 손전정을 석방하고 재기용했다. 손전정은 하남성으로 가서 이자성군과 싸웠으나 참패했다. 그리하여 주력을 이끌고 천혜의 요새인 산서성의 동관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병력은 고작 5,000명 정도 밖에 없었다. [[1643년]] 손전정은 국방부 장관격인 병부상서에 임명되어 명나라 서부의 모든 병력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 가진 병력은 원래 가진 5,000명이 고작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탈영하거나, 혹은 반란군들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숭정제는 이렇게 임명해 놓고는 손전정에게 동관을 나서서 이자성군을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손전정은 이를 계속 거부했으나, 결국 동관을 나가 하남성 여주에서 100,000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이자성군에 맞서게 되었다. 결국 1643년 10월, 이자성군은 손전정의 관군을 포위 공격했고, 결국 관군이 패하면서 손전정은 전사했다. 하지만 [[숭정제]]는 손전정이 패배한 후 숨어있다고 생각해서[* 이는 바로 전해인 1642년에 [[홍승주]]가 송산 전투에서 전사한 줄 알고, 시호까지 내렸다가 청나라에 귀순한 것을 알고 머쓱해진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믿지 않고 손전정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최후의 명장이 무너진 명나라는 이후 이자성군에게 무혈로 북경을 내주게 되었으며,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멸망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