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손책 (문단 편집) === 사후 === 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면서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했다. 아버지 손견처럼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 추존한 이유는 [[차남]]이 [[장남]]을 제쳤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훗날 [[진수(역사가)|진수]]는 "네가 네 형 아니었으면 그 위치에 있었겠냐!"라면서 대접이 박하다고 대차게 깠다. [[사마염]]도 자신의 백부 [[사마사]]를 황제로 추존한 것은 비슷하지만, 이 경우는 아들이 없었던 백부의 뒤를 친부 [[사마소]]가 이어받았던 것이라 딱히 정통성에 문제가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북제]]의 [[고양(북제)|고양]]도 자기 형인 [[고징]]을 세종 문양제로 추숭하고 고징의 아들 6명이 모두 왕작을 받고 금의 [[완안아골타]]도 형 완안오아속을 강종 헌민공간황제로 추숭한 사례 때문에 손권의 손책 무시는 당시의 관례로 볼 때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들이 모두 이민족 왕조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송서 예지에 따르면 손권이 건업에 형(손책)의 장사환왕부를 주작교 남쪽에 세웠다. 손권이 병에 걸리자, 태자가 소도(所禱, 병이 낫기를 기도함)하였는데, 바로 손책의 사당이다. 손책의 아들 [[손소#s-3|손소]](孫紹)는 손권이 황제가 된 뒤 처음에 아버지처럼 오후(吳侯)에 봉해졌다가 이후 상우후(上虞侯)로 바뀌었다. 오후라고 하면 국명인 '오'와 겹치기 때문에 바꾼 듯하다. 아무리 정통성 때문이라도 조카를 왕작도 아니고 겨우 [[후작]]에 봉한 것은 푸대접이라고 손권이 까이게 되었다. 손소의 아들 손봉(孫奉)은 상우후를 세습했으나, [[손호]] 때 제위에 오를 거라는 뜬소문 때문에 주살당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