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책 (문단 편집) == 기타 == 손책의 딸 [[손씨(삼국지)|손씨]]는 [[육손]]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은 손책이 [[육강]]을 죽인 이래로 호족 육씨와 원수 관계가 된 것을 봉합하려는 [[정략결혼]]의 의미가 강하다. 이 결혼은 육손에게 있어서도 꽤 마음에 드는 일이었는지, 그는 선대의 원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고 손가를 충실히 섬겼다.[* 만약 육손 및 육씨 세족이 계속 등을 돌린 상태였다면 이릉 대전에서 오나라가 [[멸망|어떤 꼴이 났을지 생각해 봐라.]]][* 육손의 아들이자 손책의 외손자인 [[육항]]은 아버지가 손권의 병크로 홧병 걸려 죽고, 장례식에서 손권이 20가지 질문을 던지며 핍박함에도 침착하게 대답하여 그의 의심을 풀었고, 나중에 손권이 궁색한 변명으로 용서를 구하자 받아들이고서는 그 자신도 오나라의 수호신으로서 활약했다. 육씨 가문의 또 다른 거물인 [[육개]] 역시 오나라의 충신으로써 [[손호]]의 폭주를 조금이나마 제어할수 있는 인물이였다. 육항의 아들들이자 손책의 외증손자들인 [[육안]]과 [[육경]]은 오나라가 망하는 280년에 [[서진]]과 싸우다 전사하기까지 했으니 손책은 자기가 멸망시킨 육씨 가문을 다시 회유함으로써 오나라가 멸망하는 280년까지 본인 사후에도 오나라가 존속되는 80년 가량의 시간 내내 잘 써먹었다.] 물론 말년의 육손 관련으로 이궁의 변 문제를 터뜨려 손권이 까이긴 하지만 그거야 굳이 멀쩡하게 봉합되어 있던 양가의 묵은 갈등을 손권이 지 성질 못이기고 억지로 터뜨린거지, 이 정략 결혼 자체가 문제였다고 볼 순 없다. 손책이 죽을 때 후계자로 손책의 둘째 아우이자 손견의 삼남 [[손익]]이 거론됐다. 그러나 그 잔인한 손책이 보기에도 손익의 성질머리는 도저히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봤는지[* 손익은 명백히 손책보다도 더 심각한 성격이였다. 손책은 분명히 적의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죽기나 했지 손익은 자기 부하들에게 가혹행위로 인한 원한으로 살해당했다.] 죽을 때가 돼서야 내 성질 때문에 내 스스로 명을 재촉했으니 같은 꼴을 반복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손권에게 물려주라고 못을 박은 뒤 눈을 감았다. 손권도 잔인한 것과 불같은 성질은 자기 아버지와 형, 아우 손익에 버금갔지만 자기 성격 때문에 명을 재촉한 형과 아우와 달리 덜 성질을 부려서 오나라 역대 군주 중 가장 장수했다.[* 그래도 [[합비 공방전]] 등의 모습에서 보면 분명히 그 성질 때문에 대업을 그르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동갑이었던 [[주유]]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 정사에는 쇠도 끊을 만한 우애(단금지교)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녀 자매인 [[대교(삼국지)|대교]]와 [[소교(삼국지)|소교]]를 얻었을 때도 대교를 아내로 삼으면서, 소교는 주유의 아내로 삼게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청춘 남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일화라서 그런지 여러 [[경극]]으로 로맨틱하게 각색돼서 널리 퍼졌다. 참고로 경극에서는 어쩐지 [[엄백호]]가 대교와 소교를 노리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손책이 쳐부순 적들은 대부분 한의 지방관인 경우가 많지만 엄백호만큼은 명백한 도적떼들이며 1만여 명의 병졸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도 컸고 ~~원래 캐릭터 자체가 이런 일에 어울리기도 하고~~ 또, 동생 엄여도 있어서 대교 및 소교와도 맞아떨어져서 그런 듯하다.] 손책의 정실부인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그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다. 손책의 아들 손소 및 육손의 아내를 비롯한 손책의 딸들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도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손책의 가장 유명한 아내는 [[대교]]이지만, 정사의 기록을 보면 '''약탈혼'''이며, '''첩'''으로 삼았다. 손책이 1년 뒤 요절했기에 대교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은 없다. 연의에서는 이 때문에 제갈량이 주유의 성질을 슬쩍 건드리는데 적벽대전 전 주유와 대화에서 "실은 조조에게 뭐만 주면 걘 강동은 뒤도 안 바라보고 갈 거임" 이라고 하자 주유가 그게 뭐냐고 물었는데 이에 제갈량은 이교라 대답한다.[* 물론 이는 제갈량이 구라친거다. 발음은 같은데 뜻이 다른 한자로 살짝 바꿔치기한 것] 그런데 제갈량은 이 이교는 대교와 소교를 가리킨다고 말했고 그 말인즉슨 "조조랑 싸우기 싫거든 대교와 소교를 바치면 됨" 즉 "조조랑 싸우기 싫으면 너님의 아내와 전 주인님의 아내를 바치셈" 이라는 말이 되는지라 '''NTR 당하기 VS 한판 붙기'''의 양자택일이 강요되었다고 생각해 빡친 주유가[* 안 그래도 정사든 연의든 조조의 여색은 알아주는지라 어쩄건 정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빡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연의에서는 조조가 교공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아 내가 교공의 딸들도 먹으려고 했는데 손책과 주유라는 작자들이 먼저 훔쳐갔네?" 요런 소리를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갈량은 진실을 말했던 것.] 한판 붙기를 택한다. 동진 시기 지인 소설 '어림'에 따르면 손책이 어렸을때 유비와도 만남을 가진적이 있다고 한다. '유예주가 손백부의 걸음걸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유예주는 유비. 유비가 수양에 있던 원술을 방문했는데 이때가 손책이 14살일 때 였다. 손책이 곧 유비에게 가겠다 청하자 원술이 "유예주는 군(君)과 어떠한 관계인가?"라고 묻자, 손책이 원술에게 답하여 말하길 "그를 모릅니다만, 영웅은 뛰어난 사람을 꺼리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곧 나가서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때 유비가 동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다만 손책의 걸음걸이를 돌아보고는 (그 걸음걸이에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고) 거의 다시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얘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역산하면 188년이 되는데, 이 시기 유비는 예주자사가 아니며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조조를 만나러 갔다. 나중에 예주자사가 됐을 때도 원술과는 서주 시절부터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직접 원술을 방문할 이유도 없다. 이 이야기는 당대의 영웅이었던 유비도 손책을 준걸로 봤다는 시각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듯 싶다. 출처부터가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다.[* 애시당초 원술과 유비는 당시 숙적관계였기 때문에 당시 원술의 신하였던 손책과 유비가 만날 일 자체가 없다.] [[바둑]]사에 남는 인물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서적인 '망우청락집'에 그와 여범이 둔 [[기보]]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기보 중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진위성이 의심된다는 의견도 있다.[[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84&contents_id=7855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