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학규 (문단 편집) == 평가 == >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부족했다”''' >---- >2007년 1월 10일 경향신문 "손학규 인터뷰 평가"[[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100819501&code=910100&s_code=aj012|#]] 시류에 어둡고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다. 총리나 장관 같은 임명직 관료에 맞는 사람이 선출직을 노리다 보니 생기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사실 총리같은 상급 임명직은 결국 임명시킬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는 고로 정치적 감각이 필요하긴 하다. 손학규가 그 정도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적 감각 문제로 지속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으며, 결국 그게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뽑히질 못해서 그렇지 능력과 인성은 괜찮다"라는 이미지마저 점차 사라져가 재기하기 어려워졌다. 사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2018년 이후 [[이재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도지사]] 및 [[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2007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양강에 밀리고, 진영을 옮겨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유력 주자로 부상했으나 조직표를 끌어모은 정동영에게 밀려버렸다. 2012년의 경우는 더욱 허망한데, 2010년~2011년 민주당 대표를 지내면서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험지' 분당을 당선에도 성공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부상한 친노계에게 장외 주도권을 내준 결과,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참신한 슬로건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큰 차이로 패하고 만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2016년 국민의당 창당 과정 및 20대 총선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결과,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썰전]]에서 [[이철희(1964)|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사례도 참고할 만 하다. 정세균 역시 누구에게나 알려진 정계의 신사로서 여야 어느 쪽에서건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국회의원 최대 영예인 국회의장 직을 마치고도 관례인 정계은퇴에 나서지 않고 계속 정치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세균의 지역기반이 호남이며, 정당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사'형 정치인은 결국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대로 말하면 당내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형적인 '중도 후보 필승론'에 해당하는 후보라 볼 수 있다. 양당제 구도가 고착화된 정치상황에서 양당의 핵심 지지층은 어쨌건 자당 후보가 나오면 좀 마음에 덜 들더라도 찍어줄 가능성이 높은 고정 지지층으로 보고 중도 유동층 확장력이 좋은 후보를 내세우면 승산이 크다는 논리. 그러나 분명 합리적으로 보이는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큰 선거에서 이 논리에 따라 승리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확장성 좋은 중도 후보'는 대부분 핵심 지지층에서는 인기가 덜하기에 당내 경선 등 후보 선출 절차를 뚫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주요 대선후보급 정치인으로 평가받았으면서도 대선 본선에는 한번도 진출해보지 못한 손학규가 바로 그 전형적인 예시라 할 만한 것.]. 이제 70을 훌쩍 넘은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보수층과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7.30 재보궐 선거]] 때 [[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 물론 상술한 대로 수원 병 선거구는 [[남평우]] - [[남경필]] 부자의 근거지였던 곳이라 어느 야당의 인물이 출마했어도 이기기 힘든 지역이었다. 게다가 뜬끔없는 전략공천도 겹치고. 그러나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다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영진(1967)|김영진]] 후보가 당선되며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입성하게 됐다.]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잦은 수준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두 차례 양대 정당을 떠나고 나서 국민들이 지지할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발언)으로 비판하고는 정작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 최대지분의 친노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본인도 회고에서 "한나라당에서 나를 가리켜 경포대라고 했다. 나도 예전에 사실을 잘못 알고 비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고의로 사실을 왜곡해서 남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분이 당을 옮겨 이쪽으로 건너왔다. 할 말이 없었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가했으며, 2007년 대선 당시에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나선 유시민은 손학규를 '''"보따리 장수"'''라고 비판했다.]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 노동운동 출신 정치인이 범[[민자당계 정당]]에서 범[[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 자체로는 소위 '철새'라는 나쁜 평가까지는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노무현]] 자신도 민자당 탄생 직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하여 [[민주당(1990년)|소위 꼬마민주당]]을 거쳐 민주당계 정당으로 합류한 인물이고, 철새의 왕 대접을 받는 [[이인제]] 같은 인물도 처음에는 철새 취급은 커녕 [[민자당]]~[[신한국당]] 당시의 경력까지 다 인정받아 단번에 대권주자급 정치인으로 대우받았지만 거기서 또 등돌리고 나간 탓에 줏대없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 말하자면 6공화국 이후 한국 정치사의 흐름에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정체성이 [[민주정의당|민정당]]+[[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군사정권 계통 세력과 섞이고, 정치적 성향에서도 보수정당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김영삼]]의 후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들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적(移籍)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다만 손학규의 경우 그 시기가 2007년으로 늦은 편이었기에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 이전까지 15년 이상의 기간동안 선택할 시간은 충분했을텐데, 내내 민자당~한나라당에 머무르다가 당내에서 입지를 다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민주당으로 넘어간 것 아니냐" 며 '철새 정치인이 맞다'고 비판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하지만 그 기간동안 당내에서 나름 개혁/진보파(양당구도에서는 중도파)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버텼으니 손학규가 줏대없이 왔다갔다 한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이 바뀐 것 아니냐" 며 '철새 정치인은 아니다' 라고 변호하게 되는 것. (게다가 이 점에서는 민주당이 여당이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내에서는 나름 협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또 이 점에서는 손학규에게도 이인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이적' 이 있기는 하지만 이인제마냥 경선에서 지면 바로 통수를 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 내 경쟁에서 이긴 후보를 지원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었고, 바른미래당->민생당으로의 두번째 이적 역시 혼자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정계 개편 분위기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는 점에서 최소한 이기적인 권력욕만으로 철새행보를 보였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으냐는 변호는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손학규가 '철새정치인'에 해당하느냐는 각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평가의 여지가 열려있다 보아야 할 것이므로, 상기된 내용처럼 '철새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조롱과 불신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 행보가 본인에 대한 신뢰도에 타격을 주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평가할수도 있는 것.]. 심지어는 [[이명박]]이 대통령 퇴임 뒤에, "그 사람도 참.. 한나라당에 남았으면 대권후보까지 되었을 건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는 말까지 했다. 다만 한나라당에서 나올 당시의 손학규는 이명박의 친이계와 박근혜로 대표되는 친박계 양쪽 모두에게 적대당하며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끝장난 상태였다.''' 일례로 이명박은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라고 냉소했을 정도.[[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94352.html|#]] 그러므로 훗날 이명박이 한 말은 진심으로 안타까워서라기보단 "그러길래 나한테 숙이면 편했을텐데..." 정도의 조롱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손학규가 탈당하면서 이렇다할 비박 주자가 사라진 이명박으로서는 박근혜에서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정말 손학규가 대권 후보가 될 수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 만약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아었다면, 2007년 대선 경선에서 4위로 사실상 꼴찌를 했던 홍준표의 현실이 손학규의 미래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에도 차기 대선 주자로 이재오와 정운찬 같은 본인과 성향이 잘 맞으면서 친밀한 최측근을 지지했던 만큼, 손학규가 홍준표처럼 친이계와 같은 배를 탔다고 해도, 손학규가 이명박 정부 말기 인기도가 떨어진 친이계와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친박계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본인의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어 차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강력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면,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주자가 되기는커녕 계파도 만들지 못하고 당시 당 대표 체제가 무너지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대권 주자의 꿈을 접었던 홍준표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중에 홍준표가 대선에 나가고 다시 당권을 잡긴 했지만 그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친박]] 계파가 아예 무너지고 보수 진영 자체가 궤멸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빈집털이]]를 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바른미래당 와해 과정에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마저 손학규를 등지게 된 것은 엄청난 타격이다. 심지어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9721552|손규]]라는 멸칭[* 손학규에게 모두가 ''''학'을 떼며 떠나갔다'''고 해서 학을 제외한 손규]으로 불리는 등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