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솔론 (문단 편집) == 솔론의 개혁 == 지금까지 솔론은 다 망해가는 전세를 뒤집어버린 전쟁영웅에, 30년을 질질 끌어온 국내 분쟁을 종식시키고, 외교적 영향력마저 과시하였다. 그런 솔론이 국내 모든 계층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솔론은 이미 국내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이 솔론이라면 당시 사회적 문제의 배경이자 핵심이었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제도를 혁신해줄 거라 기대하게 된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제 솔론은 [[가계부채]] 해소와 토지의 편중현상의 해결, 그리고 정치제도의 혁신을 요구받게 되었다. 당시 모든 계층은 솔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론의 출신과 직업, 언행은 당대 모든 세력이 '''"솔론만큼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할 만했기 때문이다. 지주 및 귀족계층에게 솔론은 아테네 최후의 왕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였고, 신흥 상인계층에게는 자신들과 같은 동업자였다. 그런가 하면 빈민층에게 그는 다른 귀족이나 지주, 상인들처럼 자신들을 착취하거나 사기 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에, 빈민층의 참상에 대한 공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하다는 듯이 솔론은 기원전 594년 집정관(아르콘)에 선출되었다. 그가 집정관에 마지못해 취임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취임하면서 평등은 분쟁을 낳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그 결과 부유층과 빈민층 모두가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유층은 자질과 능력에 기반 한 평등을, 빈민층은 수와 양에 기반 한 평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솔론은 모든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르콘에 취임했고, 그 결과 그의 아르콘 취임 시 참주에 등극할 것을 제의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거부의사를 표한다. 유명한 솔론의 개혁이 솔론의 아르콘 취임 이후의 일인지, 아니면 이미 취임 전부터 어느 정도 시동은 걸리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통상적으로 아르콘의 임기는 1년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무리 후진사회라고 한들 한 폴리스의 기반을 전부 들어거 뒤집어 엎는 그런 대대적인 개혁이 단 1년만에 마무리되었다고 믿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솔론의 개혁은 그의 아르콘 취임 전부터 이미 추진되고 있었거나, 아르콘 퇴임 후에도 솔론 개인의 영향력으로 인해 어떻게든 진행되었다고 믿는 것이 통설이다.] 어쨌든 그가 아르콘에 취임하면서 그가 본격적인 개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솔론이 추진한 개혁이 정확히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어있었는지는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솔론 이후의 아테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솔론이 세운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기에 별의 별 법안의 성과를 다 솔론의 업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확실하게 솔론의 것이라고 볼 만한 정책을 뽑아보자면, '무거운 짐 덜어주기(세이사크테이아)'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부채탕감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정책 이름을 "부채탕감"이 아니라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고 명명한 솔론의 작명센스에 혀를 내둘렀다. 왜냐하면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고 함으로서 ~~물론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주 및 귀족들이 채권자들이 자신들의 채권을 포기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선행위를 한 것마냥 선전했기 때문이다.]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현존하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이후 인신을 담보로 한 대출을 금지시켰다. 부채의 대상에는 당시 담보로 압류당한 농경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외에 부채로 인해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시민들을 모조리 해방시켰다. 여기에는 이설이 있는데,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하는 가설에 따르면 솔론의 "무거운 짐 덜어주기"는 통화개혁을 통해 의도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여 빈민층이 실물로 부채를 갚기 편하게 만든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솔론이 국내 모든 부채를 탕감한 것은 사실로 보이므로 "무거운 짐 덜어주기" 자체가 통화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어쩌면 이 정책 역시 병행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일단 솔론의 "무거운 짐 덜어주기"정책은 시행 되긴 했지만 모든 진영의 반발을 산다. 나중에 플루타르코스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솔론의 유능함 덕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일단 지주 및 귀족계층은 자신들의 채권이 사라져서 불만이었다. 게다가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솔론의 친구들이 이 정책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솔론 본인이 개인적으로 총액만 최소 5탈란트에서 최대 15탈란트로 추정되는 막대한 양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어느 정도의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다른 한 편으로 빈민층은 토지재분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의 정책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 스파르타처럼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를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빈민층은 아직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빈민층은 다시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리기 시작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토지를 재분배하던가, 아니면 다른 방책을 고안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솔론의 해결책은 '''전반적인 산업구조 전체의 변혁'''이었다. 일단 솔론은 농업 생산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법적 규제들을 제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아티카 일대는 토양이 척박하여 농경보다는 목축이 어울릴 정도에,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솔론은 올리브를 비롯한 작물들의 재배거리에 대한 규제들을 시행하여 농경지의 피로도를 관리하고, 우물의 설치 및 활용에 대한 관련규정들을 만들어 부족한 수자원의 효율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티카에 유입된 다수의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솔론은 부족한 식량은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역상들은 영리업자이지 자선가가 아니기 때문에 구매력 없는 빈민층을 위해 식량을 수입할 리 없다는 것은 솔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솔론은 올리브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우선 솔론은 올리브 외의 농산품 수출 규제하여 부족한 식량의 해외유출을 방지한다. 결국 잉여농산물은 팔리든 안 팔리든 어떤 식으로든 국내에서 소비해야만 했기에, 지주들이 수익을 얻기 위해 주요 작물을 올리브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올리브는 보통 올리브유로 가공하여 판매되었다. 따라서 아티카의 주력 산업이 올리브 재배가 되자, 아테네에는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는 인부를 비롯하여, 거기에 쓰이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공, 올리브유를 담는 도기를 만드는 도공 등의 수요가 급증한다. 솔론은 모든 시민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여 빈민층이 이러한 산업에 종사하여 얻은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끔 한다. 그 결과 지중해 세계에서 상당히 후진적이었던 아테네 도자기 수준은 비약적 올라갔다. 일설에 의하면 아티카 인구의 1/4가량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아테네의 도자기 또한 아테네의 주력 수출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솔론은 이민에 관련한 규정을 정해서, 자국에서 영구추방된 자나 가족과 함께 생업을 하러 오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이주를 허용한다. 아테네의 산업구조를 뜯어고친 솔론은 출신이 아닌 경제적 수준에 따라 정부기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차등을 부여한다. 이러한 솔론의 정치제도 개혁은 후세에 금권정치라고 불린다. 각각의 계층의 이름과 기준은 다음과 같다. 펜타코시오메딤노이 - 500메딤노스 이상 힙파다텔루테스(기병 복무 가능자) - 300메딤노스 이상 제우기타이(중장보병 복무 가능자) - 200메딤노스 이상 테테스(날품팔이) - 200메딤노스 이하 이 중에서도 최하위계층인 테테스도 민회에는 참여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거나 제안할 자격은 없고, 배심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한계였다. 민회에 제출되는 안건은 아티카 일대에 거주하는 4개 부족에서 100명씩 선발된 위원회에서 검토한 뒤 상정하도록 되어있었고, 전 현직 아르콘들이 참여하는 아레오 파고스 회의는 아테네의 최고법정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제도의 정비는 언뜻 보기에 부유층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책으로 보였기 때문에 귀족층은 별 다른 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솔론은 일부러 법조문에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두어, 대부분의 분쟁이 어떤 식으로든 민회에 상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이후 민회는 아테네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한다. 게다가 솔론은 부당한 피해를 시민이라면 누구나 민회에서 가해자를 고발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최고법정은 아레오 파고스가 되었지만, 최종법정은 민회가 되어버린다. 결국 민회는 상위 회의기관들의 통제를 받기는 하지만,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솔론 본인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상호견제구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은 양 파벌의 가운데에 서서 방패를 들고 양측 모두를 지켜주었다는 시를 읊기도 했다. 이 이외에도 솔론은 다양한 법과 규제들을 제정하거나 수정하였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처벌이 사형으로 고정되어있는 드라콘의 법을 폐지하여 각각의 범죄에 대한 형량을 정하였다. 예를 들어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현장에서 발견 즉시 즉결처분이 가능하지만, 여자를 납치한 자는 100드라크마, 유혹한 자는 20드라크마 벌금을 부과하였다.[* 여담으로 플루타르코스는 벌금이 너무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에 따라 자신의 시대에 비해 벌금이 무지막지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마도 "저걸 내느니 그냥 죽지;;;"라는 수준이의 막대한 벌금이었을 것이나, 시간이 지나 인플레이션에 따라 벌금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공공식사에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여, 시민들에게 일정한 양만큼 공공식사에 출석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솔론은 일정량 이상 출석하지 않는 자는 공익 무시한다는 명목으로, 일정량 이상 출석하는 자는 탐욕스럽다는 명목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이외에도 천문학 연구 결과를 달력에 반영하여 각 달을 30일로 산정하는가 하면, 결혼이나 상속, 여성에 대한 규제들을 만들었으며, 올림피아 제전 우승자보다도 전사자에 대한 보훈제도를 강화한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제도들을 제정하였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달리, 솔론은 대부분의 법률을 성문법으로 공표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안 자체를 일부러 애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법안의 의미에 대한 질문요청과 개정요구가 빗발친다. 그런데 솔론에게 있어서 본인 스스로가 질문에 하나하나 모두 답변하거나 개정요구에 모두 응답하는 것은 법률을 제정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자신의 법률에 대해 10년간 시범시행기간을 설정한 뒤, 향후 10년 간 솔론의 법률을 고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그 기간 동안의 해외여행을 요청하여 승인받아 해외로 나간다.[* 솔론이 아테네에 있으면, 자꾸 법률을 폐지하자거나 고치자고 하는 이들 탓에 그 법률이 안정적으로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이 ~~[[귀차니즘|귀찮아서]]~~ 도망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