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솔론 (문단 편집) == 평가 ==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솔론의 개혁은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솔론의 개혁은 모든 계층의 반발을 샀다. 특히 빈민층이 주도하는 산악파의 반발이 가장 심했다. 산악파는 귀족들에게 집중된 토지를 재분배해주기를 원했으나, 솔론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만을 돌려주었을 뿐이기 때문다. 이는 한 세기 전 스파르타에서 벌어진 리쿠로고스의 개혁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전국의 농경지를 국가에서 장악한 뒤 인구수에 따라 시민들에게 필요한 만큼 할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솔론을 대조하며 솔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스파르타는 전 시민을 부양하고도 남을 만큼의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후대에 이 지역에 세워진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동로마 최후의 번영을 누린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가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스파르타 외에도 [[코린토스]] 등 부유한 폴리스들도 있었다.],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척박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달리 아티카 지역은 외부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왜 스파르타에는 외부인이 오지 않았을까 싶지만 스파르타는 폐쇄적이기로 악명이 높았다.] 따라서 애당초 아테네는 스파르타처럼 모든 농경지를 인구수에 따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만큼의 농경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리쿠르고스는 헤라클레스 직계 11세손으로, 왕정사회인 스파르타 내에서 왕족의 주요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실질적으로 상당기간동안 스파르타를 통치해온 통치자였으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허나 그런 그조차 개혁 반대파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반면에 솔론은 아무리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라고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의 아테네 중산층 시민에 불과했으므로 아테네 시민 각계각층의 신뢰와 타협으로 주어진 제한적 권력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리쿠르고스가 했던 것처럼 폴리스 전체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리쿠르고스가 상황을 법에 맞추어 개편할 수 있었던 반면, 솔론은 상황에 맞추어 법을 개편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리쿠르고스가 처음부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관철하기 좋은 환경에 있었던 것과 달리, 솔론의 권력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쿠르고스가 이상을 밀어붙이는 혁명가였다면, 솔론은 주어진 현실을 고려하는 개혁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되, 이상적인 목표치를 내세운 뒤 이를 동료 시민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이 감당할 만한 한도 내에서 정책을 추진하였다.[* 솔론의 법률이 사람들이 수용할 만한 한도 내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은 플루타르코스도 동의하는 바로, 이는 고대인들이 솔론에 대해 내린 일반적인 평가이다.] 솔론은 국내 내란 중 그 어떤 정파로도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 속에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주어진 권력으로 자신의 개혁활동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솔론의 개혁은 전형적인 중도파 또는 중재자 스타일의 개혁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참주제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민주정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자신의 말과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중용을 지킴에 있어서 고분고분하지 않고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말년의 솔론은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아테네가 참주정의 길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모든 계층의 권익을 중재하다보니 모든 계층이 자신들의 권익이 보장받아야 할 최고치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론의 개혁으로 인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빈민층이 가장 반발이 심했고, 그들이 솔론의 법률을 활용하여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로 등극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망명 직전에 에피메니데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솔론의 재가 살라미스에 뿌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실각하여 망명길에 오른다. 물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망명과 복귀를 반복한 끝에 외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참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자리는 그 아들들이 물려받는다. 그러나 "최상의 법률 속에서 자유인으로 자라난 사람들에게 참주의 노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에피메니데스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인지, 결국 아테네는 민주정을 회복한다. 결과적으로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 민주정의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롭게도 반대로 리쿠르고스는 개혁이 성공하여 사회혼란이 지속되던 스파르타를 안정시키고 강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마냥 좋은 점만 있지는 않고 단점 역시도 많았으며 그 단점이 결국 스파르타를 몰락으로 이끌었다.] 다소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는 메가라에게도 밀리는 그리스의 병자에서 지중해세계의 강자로 거듭난다. 물론 솔론의 법률에 기초한 아테네의 민주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문제점 이상의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 하에서의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박살나기까지 200년간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서 번영한다. 이런 이유에서 아테네의 정치인들은 솔론 이후의 정책적 성과들마저 솔론의 업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솔론의 정확한 정책내용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편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를 번영하게 한 요인인 동시에, 아테네가 국제적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솔론은 아테네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올리브 산업을 비롯한 수공업 전반의 발전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식량자원은 거의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도록 했다. 올리브 및 수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식량자원을 수입하는 것은 아테네가 자연환경의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한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이는 아테네가 교역국의 정치적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솔론은 살라미스뿐만 아니라 트라키아의 케르소네소스(오늘날의 갈리폴리 반도)를 공략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후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이던 시절의 아테네는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여 원주민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그리스인들도 쫓아내고 그 일대를 점령하기도 한다. 케르소네소스 반도는 흑해연안으로 이어지는 주요항로로, 아테네는 해당 지역들에 올리브를 수출하고 그 지역들로부터 식량을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흑해연안은 기후가 춥기 때문에 올리브를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역들은 역으로 곡식을 수출하고 올리브를 수입하는 형태를 취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케르소네소스 반도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문제는 후일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갈등을 빚어 이오니아 반란을 후원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가 트라키아를 침공하면서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대한 아테네의 영향력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솔론이 해외여행을 다녔던 지역들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솔론이 여행을 다닌 것으로 확실시되는 지역은 이집트와 키프로스, 리디아인데, 말할 것도 없이 이집트는 지중해 최강의 식량생산국이었고, 키프로스는 그런 이집트와 정치적 긴장관계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아흐모세 2세는 그리스 세력의 도움을 받아 키프로스로 진출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리디아는 아테네가 장악해야 한다고 솔론이 주장했던 케르소네소스 반도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이후 캄비세스 2세의 침공에 맞서 아흐모세 2세가 그리스 지역에서 용병을 모집했다는 점이나,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장악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다리우스 1세가 케르소네소스와 트라키아 일대로 영향력을 확대하자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다는 점은 이러한 의혹을 가중시킨다. 결국 솔론의 개혁으로 인해 아테네는 해외교역에 목을 매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것은 역사적 필연이이었다. 아테네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폴리스들보다도 더 넓은 영향력을 지켜 내거나 영향력을 더 확장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테네의 흥망성쇠를 논함에 있어서 솔론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쨌든 솔론은 아테네라는 도시의 초안을 구축하였고, 그의 초안 위에 세워진 아테네는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아테네가 구축한 여러 문화적 유산들은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민주정을 이상으로 여기는 후대의 정치가들에게 귀감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아테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정치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는데, 일례로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공화정 초기의 정치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Publius Valerius Publicola; ?~BC503)가 솔론을 모방하여 로마 공화정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