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건호 (문단 편집) == 생애 ==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비야마을 331-6번지에서 아버지 송재찬(宋在瓚)과 어머니 박재호(朴在鎬) 사이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대대로 충청도 회덕군 동면(현 [[대전광역시]] [[동구(대전)|동구]])에 살았으나, 증조부 대에 이르러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증조부께서 가솔을 이끌고 옥천 비야곡으로 이주해왔다고 한다.[[http://www.okcc.or.kr/html/kr/person/person_20.html|#]] 대전욱정공립심상소학교(현 대전신흥초등학교)[* 1934년 증약사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 진학을 위해 [[대전광역시|대덕군]] 동명공립보통학교(현 대전동명초등학교) 2학년에 전학, 이후 6학년 때 대전욱정공립심상소학교에 전학하였다.], [[한성고등학교|한성사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곧 [[광복]]을 맞았다.[[http://www.songkunho.or.kr/songkunho/songkunho_03.php|#]] 광복 직후인 19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부를 거쳐 1956년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으로서의 첫발을 떼었고, 이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사를 거쳤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정권의 언론탄압과 기자 대량해임 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했다.([[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후 역사학 집필에 전념하여 '민족지성의 탐구',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사론', '한국현대인물사론' 등 역작을 연이어 출간하며 저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9년]]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무고한 옥살이를 하며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같은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천관우]]와도 천관우가 5공에 가담하기 전에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동아일보 기자직을 사임하고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역사 연구에 매진했던 송건호에게 1977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하자고 권유한''' 인물이 천관우였다. 이후 송건호가 1979년에 <한국현대사론>을 펴냈을 때도 천관우는 <창작과비평> 제52호에 서평을 싣고 "송건호 형[* 천관우는 1925년생으로 송건호보다 두 살 연상이다. 이 시절의 '형'이라는 말은 지금처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친분 있는 성인끼리 붙여주는 일종의 예의를 지킨 호칭에 가까웠다.]의 이 새 저술은 정통사학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현대사 개설'이라는 중요한 부분에 훌륭하게 선편(先鞭)을 지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정통 사학계에도 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고 싶다.", "1979년의 현재로, 우리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국현대사론'에 필적할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 저술은 성공적이었고 또 그만큼 축적된 근고(勤苦)의 산물이었다."라며 송건호를 극찬했다.[* 천관우 또한 고대사와 관련해 [[일본서기]]의 주요 기사를 그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식민사학이 만들어 놓은 고대사 구도의 틀을 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천관우가 제5공화국에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을 맡게 되자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비판하면서 천관우와의 교류를 끊었다. 나중에 천관우에 대해 회고하기를, > "지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현실과 타협해버린 경우가 있어서 결국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고 그러는데 죽은 사람이지만 천관우가 그런 사람입니다.'''"[[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27944|정론직필을 찾아서 - 옥천 출신 언론인 송건호(충북일보)]] 1984년 해직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를 결성, 초대 의장을 지냈다. 특히 월간지 [[말(잡지)|말]]을 창간해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노동자·농민의 실상과 민주화운동 등을 소개하는 한편, 1986년에는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어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이끌었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지냈다. 그는 이 시기에 편집권의 독립, 냉전보도의 자제 등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신군부에게 받았던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했고,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2001년 12월 21일 타계하였다. 제1회 심산학술상(1986), 한국언론학회 언론상(1991), 호암언론상(1994), 금관문화훈장(1999), 정일형자유민주상(2000) 등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평전인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가 발간되어 있다. 송건호 본인의 삶 자체도 훌륭하지만 전기문학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작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