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계백 (문단 편집) === [[2.8 독립 선언]] ===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1918년 여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간행물 <학지광>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던 [[최팔용]](崔八鎔)은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 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의하고, 비밀리에 유학생들의 의사를 타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이듬해 1월에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후 영국인이 고베에서 발행하는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에서 "세계약소민족동맹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약소민족의 독자적 권리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보도하자, 최팔용 등은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서둘러 독립 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송계백은 이 계획에 적극 동참하여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1894)|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최근우, [[김상덕]], 전영택 등과 함께 10인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운동 방략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 발표하고, 이를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것을 결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계획을 추진했다. 그들은 밀사를 각지에 파견하기로 하고 국내에는 송계백을, 상하이엔 [[이광수(소설가)|이광수]]를 파견하기로 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중순 국내로 잠입하여 현상윤을 찾아가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보여주며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현상윤은 이것을 가지고 가서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보였고, 다시 [[최린]]을 찾아가 보여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했다. 손병희는 이것을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했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했다. 이렇게 해서 [[3.1 운동]] 계획이 긴급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1월 30일 도쿄로 돌아간 송계백은 나머지 실행위원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국문, 일문, 영문 등 3개 국어로 백관수의 지도 아래 최원순, 정광호 등 10여 명의 학생들이 등사판으로 만들었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일문 활자로 1000매 인쇄했다. 이윽고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송계백을 비롯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일본 국회, 조선총독부, 도쿄 및 각 지역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때 일본 경찰이 대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송계백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