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만갑 (문단 편집) == 생애 ==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송만갑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설과 [[전라남도]] 구례라는 설이 대립 중에 있다. 여기서는 우선 대다수의 백과사전류에서 취하고 있는 통설에 따른다.][* 그 외의 소수설로 [[전라북도]] 남원, [[경상남도]] 진주라는 설이 있다.] 본관은 여산으로 그의 제적등본 윗면에 '무(巫)'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세습 무업가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통연희사전》] <송만갑 가계도> 송흥록 송광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 그의 큰할아버지 송흥록은 가왕(歌王)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대명창]]이었다.[* 《춘향가》 가운데 옥중가의 귀곡성이 송흥록의 더늠이라고 한다. 그가 진주성 촉석루에서 이 대목을 소리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는 조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을 전설로 달고 내려 오는 것은 서편제 명창인 이날치가 새타령을 부르자 새가 날아 들었다고 하는 설화와 더불어 유이한 사례로 꼽힌다.] 그가 명창으로 이름을 얻은 이래 그 동생인 송광록 역시 형을 따라 고수 노릇을 하다가 명창이 되었으며, 아버지 송우룡 역시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역시 부친에게 7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 자신은 주덕기의 제자인 박만순에게 10여년 동안 소리를 배웠다고 하였다. 《한겨례음악대사전》] 어려서부터 명창의 자질을 갖추어 13세 때에는 이미 소년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후일 서편제 명창이었던 정창업의 소릿제를 참고하여 계면조를 수용하고 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경서도 토리 특유의 경드름제[* 경조, 경제, 경토리라고도 한다. 경쾌하고 건들거리는 리듬으로 짜인 창제를 말한다.]를 받아들이는 등 동편제의 소리 지향을 넓히는데 힘썼다. 이 때문에 선배 명창이었던 박기홍은 물론, 동시대의 전도성, 아버지 송우룡에게까지 송씨 가문의 소리를 망친 '''패려자식'''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그로 인해 가문의 족보에서도 할명 당했다느니 아버지 송우룡에게 독살을 당할 뻔 했다느니 하는 전설이 유명하다. 30대 후반부터 서울에 머무르면서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었던 [[협률사|원각사]](圓覺社)[*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다.] 무대에 자주 섰으며, 이때 '어전광대' 노릇을 해 감찰 벼슬에 제수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를 '송감찰'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거나 그의 소릿제를 '감찰제'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 원각사 폐쇄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을 3개월 정도 역임했다고 한다.] 60대 이후에는 김창룡, 이동백,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협률사를 조직해 공연활동에 나서기도 하면서 판소리 뿐만 아니라 창극 운동에도 주력했다. 1906년~1907년부터 음반을 취입[* 이 시기의 녹음은 저 유명한 [[헐버트]]에 의해서 주선된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배연형·석지훈, 「20세기 초 유성기음반 녹음 연구 - 1906년 녹음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 레코드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58, 한국국악학회, 2015 참조.]하기 시작하여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현재 유명한 것으로는 단가인 진국명산(Victor Junior KJ1001-A), 흥보가 박타령(Columbia 40219-A), 적벽가 조조금무가(닛뽀노홍 K202-A)[* 현재 송판 적벽가에서 '이놈 저놈 다듣거라'하는 중중몰이 장단의 대목이다.], 춘향가 십장가(Columbia 40145-B)[* 정확히는 십장가 바로 뒷대목인 '남원 오입쟁이' 사설이다.], 적벽가 적벽원조사(닛뽀노홍 K188-B)[* 원판에는 '적벽원조자'로 되어 있다. 아마 '적벽원조가'이거나 '적벽원조사'의 오자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적벽가 새타령'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춘향가 농부가(Victor Record 13536 Korean Male Song With Drum)[* 이 녹음이 그의 최초 녹음 중 하나로 보인다. 《한국전통연희사전》] 등이 유명하다. 1939년, 왕십리에서 별세했으며, 아들 송기덕 역시 어려서 그와 함께 음반을 취입하는 등 소년 명창 대우를 받았으나 후일 고등계 형사 노릇을 하다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