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병선 (문단 편집) === 초년기 === 송병선은 1836년 8월 24일 충청남도 회덕현 성남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전주 이씨|완산 이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송시열]]의 9대손으로, 송시열 이후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했다. 송병선은 9살 때부터 백부 송달수(宋達洙)에게 《[[소학]]》을 배웠고 숙부 송근수(宋近洙) 밑에서 수학했다. 송달수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했던 호락논쟁을 배제하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며 순수학문적 자세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또한 송근수는 1882년에 좌의정에 재임하면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교섭에 반대해 사직했고 1884년 서양식 복장을 관복에 도입하자 "전통질서 중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송병선은 이러한 백부와 숙부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연히 성리학 본연의 학문에 집중하고 외세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견지했다. 송병선은 이상수(李象秀), 박성양(朴性陽), 정해필(鄭海弼)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유했다. 송달수의 문하인 이상수는 조정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면서 몇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도(道)가 아니면 처(處)하지 않는다"며 끝내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박성양 또한 송근수의 천거로 관직에 들어서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동부승지, 호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지만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문물을 단호히 배격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후 사직했다. 정해필 역시 송달수 문하에 들어간 인물로, 송변선에게 학문을 계속 익힐 것을 격려하며 ‘연재(淵齋)’라는 호를 추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