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병선 (문단 편집) === 위정척사 운동 === 1865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만동묘]]가 훼철되자, 송병선은 이를 춘추의리 정신의 파괴로 간주하고 이듬해인 1866년 입산지계(入山之計)를 결행하고자 아우인 [[송병순]]이 살고 있는 옥천의 오산(梧山)으로 이사갔다. 그는 그곳에서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를 간행했다. <송자대전수차>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가운데 난해한 구절을 뽑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것이다. 만동묘가 철폐된 시점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것은 만동묘 훼철로 약화된 송시열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송병선은 또 <벽사설(闢邪說)>을 편찬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正)’의 대상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질서이며, ‘사(邪)’의 대상은 양묵(楊黙)의 학을 비롯한 불교와 천주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천주교의 교리 가운데 예수를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생부를 잊겠다는 패륜적인 행위이며, 제사를 금하는 것은 영혼을 믿지 못해 스스로 오류에 빠지는 일이라며 배격했다. 그러면서 주자학이야말로 조선이 진정으로 수호해야 할 이념 체계라고 밝혔다. 그는 또 [[주자(철학자)|주자]]가 집필한 <근사록(近思錄)>에 [[조광조]], [[이황]], [[이이(조선)|이이]], [[김장생]], [[송시열]]의 학설과 유훈을 덧붙인 <근사촉록(近思續錄)>을 1874년에 편찬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섯 선생의 글을 읽고 큰 뜻을 품어 오랫동안 천여 조의 글을 모아 (중략) 한 책을 만드니, 무릇 진실을 구하고 힘을 쓰고, 자기를 처신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에 미칠 것이며 이단을 판별하여 성현의 일을 볼 것이다"라고 밝히며 척사(이단을 판별)를 통해 위정(성현의 일)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결국에는 조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며 비판했다. 송병선은 1877년부터 1903년까지 태능참봉(泰陵參奉), 서연관(書筵官), 경연관(經筵官) 등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했다. 그는 혼탁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서 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상소를 10여 차례 올려 척사론에 입각하여 조선의 문물을 사수하고 서양과 일본의 문물을 단호히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에 아예 관심을 끊지는 않았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고 개화정책이 시행되자, 송병선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궁궐 수비를 엄하게 해 간신배들의 출입을 끊고 무위영(武衛營)을 없애고 진무(鎭撫)를 설치하여 변방을 수비해야 하며, 묘원을 복원해 사림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신사봉사(辛巳封事) 8개조를 담은 상소를 올려 조선책략의 내용을 단호히 배격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제1조 성학에 힘써 마음과 뜻을 바로잡을 것. >제2조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과실을 들을 것. >제3조 세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제4조 상과 벌을 미덥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제5조 검소한 덕을 밝혀서 재용을 절약할 것. >제6조 벼슬자리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 >제7조 공물의 진상을 정지하여 일의 근본을 보존할 것. >제8조 왜국과의 화의를 배척하고 예수교를 단절할 것. 특히 8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이웃 나라와의 교류는 나라의 큰일이지만 지금 말하는 이웃 나라란 바로 오랑캐일 뿐입니다. 우호를 맺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살피지 않는다면 한갓 스스로 어리석은 데 귀결되어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1884년 정부의 의복 및 관복을 개량화시키는 조치에 대해서도 "기본질서인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 질서또한 보장될 수 없다"며 의복 개량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지금까지 사용한 한복을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상소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듣건대, 요즘 의복 제도를 변경하는 일로 명을 내리고 절목을 이미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인심을 거스르고 듣기에 놀라운 천만뜻밖의 지나친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개 제왕의 정사를 보면 연혁(沿革)하고 손익(損益)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모두 곡절이 있어서 혹은 옛것을 가지고 오늘의 것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중하(中夏)의 문명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기도 하며, 혹은 등위(等威)를 밝게 보이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게 하기도 하였을 뿐인데, 지금의 조치는 이 네 가지 중에 해당되는 게 과연 있습니까? >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큰 원칙이 있고 요령이 있으며, 일정한 규정이 있고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인륜을 닦고 도술(道術)을 숭상하며 성헌(成憲)을 지키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물채(物采) 같은 부차적인 것은 비록 좋게 바꾸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명왕(明王)이 급급해할 것이 아닌데, 더구나 좋게 바꾸는 것이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또 차림새나 물채는 설사 부차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국조(國朝)의 전헌(典憲)과 관계되어 매우 중대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혹 이에 대하여 생각하셨습니까? > >아, 우리나라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 제도가 옛 제도에 다 부합되지는 못하지만 실상 이것은 명(明) 나라의 제도이니, 어찌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온 세상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게 되었으나 오직 한 모퉁이의 우리나라에만 그 유물이 겨우 보존되고 있으니, 세상에서 우리나라가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그런데 지금 무단히 이를 바꾸어 괴이하고 법도에 맞지 않게 한다면 중화(中華)를 따르고 생각하는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세상이 바뀌어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1644)이 다시 돌아오니 대소 신민이 다 같이 나라를 잃은 명나라에 대하여 슬픈 감회에 젖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겨우 보존되고 있는 의물(儀物)마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보아 버린다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의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신은 통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 >또 듣건대, 새로 제정한 절목이 저 사람들의 복식과 거의 유사하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저들에게서 그것을 취하셨는지 내심 의아스럽습니다. 넓은 소매의 옷과 늘어뜨린 띠는 여유 있고 위엄 있는 모습이 저들의 몽땅한 것에 비해 편리함과 겉보기가 천지 차이입니다. 더구나 귀천(貴賤)과 존양(尊攘)의 뜻이 그 가운데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조(高麗朝)에 세자(世子)가 원(元)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가 머리를 땋아 늘이고 오랑캐의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래하는 저들의 차림새는 우리 도성 사람들의 의상 속에서 가라지와 쭉정이 같이 눈에 거슬려서 나라 사람들이 원래 미워하고 있는데, 더구나 저들의 복식을 본떠서 만백성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입게 한다면, 신은 필부(匹夫)의 뜻은 필시 빼앗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며 야만의 땅이 될 것이라 했던 이천(伊川)의 한탄이 당장에 있게 될 것 같습니다. > >아! 전하께서는 이런 점을 어찌 미처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반드시 말없이 도와주고 일깨워주어 중천(中天)에 나타난 일식(日食) 현상이 잠시 보였다가 곧 회복되는 것처럼 될 것이니, 신은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이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가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전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의 제도는 본래 고제(古制)가 아닐 뿐 아니라, 또 지금은 법도가 문란하고 습속이 타락하여 떨쳐 일어날 기약이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전후의 칙교(飭敎)에서 고제를 원용하고 지금의 것을 참작하여 번잡한 것을 제거하고 간편하게 하되 먼저 의복 제도부터 변통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경이 산림(山林)의 숙망(宿望)으로서 분연히 달려와서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보좌하고 인도해 준다면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풍속을 순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떠나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송병선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85년 3월 가족과 함께 옥천의 원계(遠溪)에 집을 짓고 동생 [[송병순]]과 함께 문인 양성에 치중하여 '연재학파(淵齋學派)'를 형성해 위정척사사상을 심화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