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응창 (문단 편집) === [[임진왜란]] ===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 3품 병부우시랑[* 조선으로 치면 병조 참판 명나라에선 조선의 판서 급인 상서(정 2품) 밑에 정 3품 좌, 우시랑이 있고 남경에 비록 한직이지만 정부를 남겨놔서 남경 상서와 시랑직이 명예직으로 존치 했다.]겸 경략비왜군무(兵部右侍郎經略備倭軍務)로 임명되어 사실상 조선 파병 [[명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조선]]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사실상 임진왜란 초기 조선 내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그는 1592년 12월 내내 조선에 파견될 명군과 보급 및 물자를 점검하였으며,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군을 주축으로 한 42,000명의 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파견한다. 임진왜란 직전 터진 영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단기간에 대병력을 편성하여 신속하게 전개한 데엔 송응창의 관리 수완이 한 몫 했으며, 결과적으로 조명 연합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자 이를 항의하는 조선의 관리들과 장수들에게 사과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민약탈, 부녀자 강간, 조선인 살해를 저지르는 병사들을 참수형에 처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군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애를 썼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이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병부 상서 [[석성]]에게 탄핵되어 파직되고, 본국으로 소환된다.[* 송응창의 후임으로는 고양겸이 임명되어 왔다.] 그래도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 2품[[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로 임명되었으나 나중에는 낙향했고 죽을 때까지 인화에서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