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헌주 (문단 편집) === 독립운동 및 사회활동 === 송헌주는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된 뒤 하와이를 떠나 캘리포니아 중부의 리들리로 옮겼다. 그는 1921년 4월 리들리 건제회사의 이사를 맡아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또한 그는 국민회 지방회에 참여했지만 정치 문제에 관해 침묵하다가 1921년 10월 국민회 다뉴바지방회에서 개최한 [[단군]] 탄일 기념예식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지자 최급무는 무장투쟁이고 외교는 그 다음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원래 우리 사회가 저같이 분노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으니 우리 임시 대통령은 졍부 소지에 있어 민심을 수습하며 사직한 각원 들을 위로하여 다시 시무케 하며 단결케 해 사업이 계속될 선후 방침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늘 미국으로 건너와서 우리 독립을 미국에서 찾겠다고 하니 이 어찌 우리 동포가 낙망할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전투를 벌여 피를 흘려야 외교도 할 수 있고 자유를 찾을 희망이 있으니 싸움을 준비해야 합니다. 당시 미국의 한국 독립세력은 상하이의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폐지를 거론하는 국민대표회의를 반대하며 1921년 12월 시사연구회를 다뉴바에서 조직했다. 이에 맞서 국민대표회의에 찬성하는 세력은 그해 11월 국민대표기성회를 조직했는데, 송헌주는 여기에 참여했다. 이로볼 때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에서 해임된 뒤부터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송헌주는 노동사회개진당에서도 활동했다. 이살음이 주도한 노동사회개진당은 국민회 중심의 미국 본토에서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를 지지하였던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송헌주가 이 단체의 대표원을 맡고 있었다. 이 단체의 고문부에 찬성장으로 서재필과 김규식이, 대표원으로 조소앙과 송헌주가 선임되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1925년 이승만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서 탄핵되자 임시정부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때 송헌주가 이 성토문에 적극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승만에 적대적인 국민회에서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23년 전후, 송헌주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본금 5천 달러의 식료품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이들 가운데 5천 달러 규모의 식료품점은 3곳뿐이었다. 그는 이러한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1925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의 기근을 돕기 위해 조직한 임시조국동포구제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그는 국내에 두고 온 딸 송순이를 미국으로 부르고자 하여 여러차레 시도했지만 일제의 허가가 나지 않아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1965년에 죽기 직전 한국에 방문할 때까지 딸을 만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