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쇠말뚝 (문단 편집) === 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 === 공식적으로 [[조선총독부]] 혹은 조선주둔 일본육군이 조선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은 일이 없으니 당연히 기록이 없다.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였다고 할지라도 파편적인 자료들은 남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만 해도 이러한 파편적인 사료들이 남아있다. 당시 강제동원에 투입된 군인들이 쓴 일기라든가, 전범재판 당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증언들을 적은 당시 판결문이라든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대부분 공식 기록이 소각되거나 하여 극히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파편적 사료들에 의거해 밝혀낸 것들이다. 그리고 일본 스스로 남긴 자료들도 이러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국가기록원에 이런 자료들이 어느 정도 보존되었다.[[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Info.do?menuId=11|조선총독부 기록물 개요(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관리)]] 그렇지만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곳곳에 박아넣는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설마 쇠말뚝 박기가 여타의 만행들보다 더욱 극악하다고 믿었기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증거들을 없애버렸을까? 또한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다는 발상은 [[한자 문화권]]의 전근대적 사상인 [[풍수지리]]에 기반한 것이다. 풍수지리 관념은 한자 문화권에 존재했던 생각으로, 일본이 [[흑선내항|미국의 강제 개항]]으로 인해 '[[근대화]]'된 이후로는 이런 사상 자체를 구시대적이라며 배척하는 풍조가 짙어졌다. 사실 조선에 들어와있던 서양 [[선교사]] 등도 공통적으로 한국의 풍수지리 관념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관념이라며 비판하였다. [[https://www.kci.go.kr/kciportal/co/download/popup/poDownload.kci?storFileBean.orteFileId=KCI_FI001515134|#]] 게다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로 근대화 시기에 일본은 [[국가신토]]마저도 종교가 아니라고 간주했고, 자국의 오래된 종교전통도 전폭적으로 뜯어고쳤다.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신토가 반쯤 합쳐진 상황이었는데 둘을 억지로 뜯어내었다. 또한 일본의 미신이라고 간주한 전통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많은 사찰과 음사(淫祀)로 간주된 신사들이 타격을 받았다. 근대기 일본의 군대나 관료집단은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는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국의 수많은 종교시설과 전통신앙을 개화의 걸림돌로 여기고 정리해버렸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통치에는 언제나 관심이 넘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인, 또는 주술적인 요소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조선신궁]]만 하더라도, 기껏 돈을 들여 완공해놓고 [[예대제]] 같은 큰 행사 때에는 총독부 관리들이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신궁의 [[궁사]](신사의 책임자)가 조선총독에게 항의하고 나서야 겨우 참석했을 정도였다. 조선신궁 항목을 보면 일제가 본인들 전통도 아닌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사실상 돈과 인력을 갖다버리는 일을 했다기에는 일본 식민당국 자신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조차 오히려 손발이 안 맞아서 결국 졸속한 방법으로 타협하고 진행하였다. 정리하자면 막상 일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은 물론이고 자기네 나라인 일본 본토에서도 각종 신토적 민간풍습 따위를 미신적이고 미개하다고 혐오한, 뒤틀린 근대주의자들이 오히려 주류적인 성향이었다. 일본은 풍수에 관심이 없었고 측량과정이었을 뿐이라는 내용은 [[이이화]]가 역사풍속기행에 쓴 것으로, 각 언론보도로 내용이 알려지자 적잖은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이화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 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 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 '동아일보' 1999년 6월 7일자 기고문] 라고 반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