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쇠말뚝 (문단 편집) == 쇠말뚝 설화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있었다 == 한국 각지에는 꼭 외세가 아니더라도 그 지방의 기를 풍수적으로 꺾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았다거나 기세를 억눌렀다거나 하는 전설이 폭넓게 존재한다. 즉 일제 쇠말뚝 이야기는 말뚝을 박는 주체가 일제로 바뀌었을 뿐, 기본적인 골자는 훨씬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방방곡곡에 혈침을 박거나 맥을 끊었다는 비슷한 민간설화가 여러 곳에서 전한다. [[택리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충북 단양군 매포읍 단봉산에는 '작살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여송(또는 왜군 장수)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보니 단봉산이 기러기 날개 치는 듯한 형상이라 장차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날 곳이었다. 그래서 이여송/왜장이 날개에 해당하는 혈자리에 작살을 박아 맥을 끊었고, 이후로 단양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단 것이다. 그래서 단봉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에 '작살고개'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이 전해지는 곳 중에서는 아예 이여송이 간 적이 없는 곳도 있어 역사적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 신기하게도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한 지역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을 대중적으로 믿는 조선 민중은 조선 땅에 들어온 외세를 풍수지리와 연결하여 이러한 음모론을 상상하기 십상이었던 모양이다. 고전소설 [[임진록]]에도 이 설화를 반영해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짓을 한 이유가 [[김응서]], [[강홍립]] 등 조선 장수들의 용맹을 보고 경계해 조선에 다시는 영웅호걸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나오는데... 정작 실제 역사에서는 김응서가 이여송이 경계할 만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강홍립은 아예 평양성 전투 당시에는 관직에 있지도 않았다. 강원도 강릉에는 16세기 [[중종(조선)|중종]] 때에 한급(韓汲)이란 사람이 강릉부사로 부임했는데 지역 유림들에게 무시를 당해서, 또는 강릉 사람들의 기가 너무 드세서 꺾어버리고자 모산봉의 산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런 풍수적 조치 때문에 더 이상 강릉에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것. 전라남도 해남에도 18세기 해남현감 김서구(金叙九)가 지역의 기를 꺾어버리고자 말뫼봉이라는 산의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전설이 전한다. 제주도에 전해지는 '고종달 설화'도 있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고종달이란 승려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받고 제주도의 지기를 끊기 위해 제주도의 혈자리 여러 곳에 철심을 박았는데, 거기서 피가 흘러나와(!) 지금의 [[오름]]이나 [[삼성혈]] 같은 지형이 되었다는 것. 이런 조치 때문에 제주에서는 마실 만한 물이 나지 않고 큰 인물 또한 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라산의 산신이 중국으로 돌아가던 고종달에게 벌을 내려 제주도 앞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전설도 전하는데, 그곳이 지금의 차귀도라고 한다. 고종달은 12세기 송나라 사람이던 [[호종단]](胡宗旦)이 와전된 이름이며, 실제로는 승려가 아니라 [[지관]]이었다. 그는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온 후 귀화하였는데, 송나라에서 [[태학]]을 다닐 정도의 엘리트였기 때문에 [[예종(고려)|예종]](1105-22년 재위)에게 국가 풍수사로서 중용받았다. 예종은 호종단을 당시 고려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지역이던 제주도로 파견하여, 제주도의 토호들을 제압하고 완전한 고려의 판도로 장악하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물맥을 끊는다며 실제로 쇠말뚝을 박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호종단에게 품은 반감이 신라 말기부터 퍼진 풍수지리설 관념과 얽혀서 '고종달 설화'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쇠말뚝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비슷한 설을 반박한 다산 [[정약용]]의 글이 있다. 철로 만든 말을 보고 노인들이 '이건 왜인들이 정기를 누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자 이를 반박한 것. >소천(苕川)의 북쪽, 유산(酉山)의 서쪽에 철마(鐵馬)가 산등마루에 있는데, 그것은 작기가 쥐만 하였다. 그런데 고로(故老)들이 전하기를, > >[[임진왜란|왜구(倭寇)의 난(難)]] 때 왜구 중에 [[풍수지리|풍수학(風水學)]]을 잘 아는 자가 있어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므로 이것으로 그 정기를 눌러놓고 간다 고 하였는데, 맥양 동네에 역려(疫癘)와 요찰(夭札)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콩[菽]과 보리[麥]를 삶아서 조심스레 제사지내며, 인하여 그 동네를 마현(馬峴)이라고 이름했다. >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야인(野人)들의 말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가형 '''왜인(倭人)이 이것을 만들었다면 그가 즐겨 우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눌러놓고 간다.고 하였겠는가.''' 그리고 설사 우리들이 그 말[馬]을 보고서는 의심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미 그것이 산천의 정기(精氣)를 누른 것임을 알았다면, '''또 어찌 뽑아내어 버리거나 달구어 식도(食刀)로 만들어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것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를 지내고 그것에다가 우리의 재앙을 없애고 우리의 복(福)을 맞이하기를 바랐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유래(由來)가 오랜 것이요, 왜인의 짓이 아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말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음사(淫祀)이다. 옛날에 마조(馬祖)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있었는데, 맨 처음 말을 기른 자에게 제사한 것으로 이는 마치 맨 처음 [[양잠]](養蠶)을 가르쳤던 자를 선잠(先蠶, 맨 처음 양잠을 가르쳤던 신[神])으로 모셔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요, 고의로 말[馬]을 받들어 [[신]](神)으로 삼아 그에 제사지내는 것과는 같지 않다. > >그러고 보면 마을 백성들이 철마(鐵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 >무슨 물건이든 오래되면 신(神)이 있는 것인데, 저것이 비록 [[철(원소)|철]](鐵)로 주조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유래가 오래되었다면 신이 있을 터인데 어찌 그 제사를 금할 수 있겠는가. >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 >[[생명]]이 있는 물건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건은 옛것 아닌 것이 없는데, 만일 옛것이라 하여 모두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자네는 앞으로 제사지내는 일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 >하였다. >---- >다산 시문집 12권 中, '철마(鐵馬)에 대한 변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60A_0120_020_0120_2000_005_XML|#]][* 이 글에 언급된 철마는 그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서낭당]] 신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서낭당에 조그마하게 철로 말(馬) 형상을 만들어 모신 곳이 많다. 어떤 곳에서는 이 철마가 서낭신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그 자체로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정약용의 글에 나온 철마는 산등성이에 있었다고 하니, 산신이 타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풍수적으로 수작을 부렸다는 전설에서는 대체로 해당 지역민의 입장에서 보기에 '힘 있는 타자'가 술수를 부린다. 여기에서 힘 있는 타자는 이여송이나 왜군 장수, 또는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 같은 외국의 높은 양반일 수도, 임금이 지역에 파견한 목민관일 수도 있다.[* 승려가 양반들의 횡포에 기가 질려서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풍수적 수작을 부렸다는 전설 등등도 더러는 있다. 하지만 이처럼 약자 계층이 수작을 부렸단 전설은 드물다.]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제는 그런 힘 있는 타자란 조건에 너무나 잘 부합한다. 즉, 쇠말뚝 설은 허구인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되었고, 단지 풍수적 수작을 부린 주체를 일제로 바꾸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