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나라 (문단 편집) === [[천하통일]] - [[위진남북조시대]] 종결 === [[수문제]]는 [[선양]] 받아 수나라를 개국하고 즉위 후 [[시안시|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장성을 복구해 [[돌궐]]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뒤이어, 곧 북조 괴뢰정권인 [[징저우|강릉]] 일대의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수나라 군세는 [[회하]]를 따라 늘어선 적의 요새를 정복해야 한다든지, 혹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등의 걱정들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왜냐면 이미 [[북주]] 시절부터 남조의 수도 [[난징시|건강]]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요소인 회수 인근 장강 북쪽을 모조리 다 장악했고, 장강 상류의 [[촉]]([[쓰촨성]])까지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수나라는 과거 서진이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함대를 촉 땅에서 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고 진은 과거 [[오(삼국시대)|오]]가 그랬듯이 양면전선을 맞이해야 했다. 진숙보가 그나마 멀쩡했다면 멸망의 시기는 조금 늦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수나라 인재풀을 보면 사실상 조금 유예가 더 길어진 정도다. 강남 정권이 화북 정권의 공격을 막으려면 전통적으로 형주([[샹양|양번]])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 그리고 [[회남]] 일대를 차지하고 [[합비]] 쪽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진숙보 시절에 이미 저 요충지는 모조리 다 수나라에 넘어간 상태였다. 수나라의 [[진(육조)|진]] 정벌 준비는 587년 시작되었다. 산둥 반도, 후베이성, 한수(漢水), 그리고 가장 선박이 많이 건조되던 촉의 영안(永安)까지, 대규모 전함 건조가 여러 장소에서 행해졌고 수 제국 대장군 [[양소(수나라)|양소]]는 영안에 머물면서 향후 자신이 지휘할 함대의 규모를 보고받고 있었다. 북조 국가들은 기병을 동원한 육전에는 강했지만 수전에 능하지 못했던 반면, 남쪽의 육조 국가들은 대대로 선박의 건조와 함대의 운용에 능했고 건강의 정복을 위해선, 북조 정권은 어떻게든 장강에서 남조 수군을 정면에서 몰아낼 힘을 지닌 독자적인 함대를 건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일 거대했던 선박은 오아전선(五牙戰船)이라 불린 거대한 전함들이었다. 오아(五牙)엔 5층에 달하는 누각이 세워졌고, 8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실었으며, 뾰족한 가시가 잔뜩 박힌 철구를 단 박간(拍竿)이란 긴 장대를 달고 있었다. 박간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면 적 함선을 손상시킬 수 있었고, 혹은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켜 도망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투사무기를 이용한 집중적인 근거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다음 가는 함선급으론 황룡전선(黃龍戰船)이 있었는데, 각 황룡전선은 1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588년 가을, 문제는 과거 [[오멸망전|오나라를 치던]] [[서진]]처럼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대군으로 [[진(육조)|진]]을 침입했다. 수나라 8개 군이 촉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 장강 북변 전면에 배치되었다. 수나라 대군을 상대할 [[진(육조)|진]]의 전력 약 10만은 장강 상류부터 황해 바다에 이르는 모든 구간을 막아내야 했다. 진의 군대는 주로 전선의 서쪽 끝과 수도 건강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수나라의 기본 전략은 장강 상류의 양소 군단이 진의 수군을 묶어둠으로서, 진의 수도 건강을 마주보고 있던 총사령관 양광이 이끄는 본군이 장강 하류를 빠르게 도하하는 최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전략이 실패로 끝나 진의 수군이 건강 방어를 위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여전히 양소의 수군은 장강을 따라 동진하며 건강을 공격하는 수나라 육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진(육조)|진]]에선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놈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다. 또 공범도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대비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풍악을 울렸다. 정명 3년(589년) 정월, 수나라 오주 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진숙보는 공신이자 대장군 소마가의 후처를 범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이에 소마가는 종군을 거부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숙보 즉위에 공을 세운 소마가가 수나라 군사를 요격하러 갔으나, 그동안 진숙보는 소마가의 아내를 입궁시켜서 놀아났고, 이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홧병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겁쟁이 진숙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여러차례 장군들이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시문경은 이를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589년 수나라의 본대는 장강 하류를 도하하여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다. 진숙보가 측근 십여 명을 데리고 경양전을 나와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후각사인 하후공운이 막았으나 진숙보는 기어이 우물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당황한 진숙보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알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멸망했다. 4월,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이때도 항상 술에 취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수 문제에게 궁궐을 화려하게 하고 사치를 즐기라는 서신을 보내서 수 문제에게 신하들과 함께 "아직도 자기가 왜 망했는지 모른다"며 비웃음을 당했다. 진숙보와 함께 나라를 말아먹었던 장귀비,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간신]]으로 지목되어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후한]]이 멸망한 이후 400여 년에 가깝게 지속되던 [[위진남북조시대]]가 끝이 났다. 양견은 진숙보의 진씨 일가와 양나라 왕조 후예들을 전부 숙청하였고 숙청을 피한 나머지는 서쪽에 이주시켰다. 하지만 몇년 후에 양견은 서쪽에 이주시킨 진숙보의 진나라 일족 전부와 양나라 왕조 후예들을 전부 노비로 삼으니 그 노비 수가 매우 많았고 이후 역사 기록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