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수나라 (문단 편집) === [[고구려-수 전쟁]]과 멸망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고구려-수 전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A0%EA%B5%AC%EB%A0%A4%EC%99%80%20%EC%88%98%EC%9D%98%20%EC%A0%84%EC%9F%81.png|width=100%]]}}} || 6세기 후반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돌궐이 수나라를 위협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과 협력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수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고구려 사신을 목격함에 따라 [[고구려]]와 [[돌궐]]의 연계를 경계하게 된다. 598년 영양왕이 다스리고 있던 고구려는 요서(遼西)를 선제 공격하였고 수나라는 이를 방어하였다. 이후 수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양제(煬帝)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113만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도한다. 자치통감에서는 113만의 병사에 수송대가 그 두 배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300만 대병이다. 다만 그렇다고 300만의 대병이 모두 요동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은 아니고 113만 명은 고구려의 방어선을 공격하고 나머지 200만은 중국 본토에서 요동전선까지 보급품을 실어나르거나 혹은 군사들이 싸우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이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어난 [[베르됭 전투]]의 등장으로 깨진다. 여담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투병력을 동원한 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피비린내가 나는 [[독소전쟁]]의 개막인 [[바르바로사 작전]]이다('''총 430만''', 독일 및 동맹국군). 이러한 수나라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수나라 중심의 천하관 확립과 관계가 있다. 당시 수나라는 중국이 중심이 된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와 같은 독자적인 천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수나라의 천하관과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고구려의 세계관의 충돌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수나라는 3차례의 원정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여수장우중문시]]까지 지으며 수나라를 조롱하였다. 다만 고구려도 피해가 워낙 큰터라 양제가 4차로 침공해왔을 때는 고구려로 망명해온 [[곡사정]]을 돌려보내며 수나라에 귀부하겠다고 제안하여 양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은 종결된다. 이 전쟁에서 수나라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었는데 살수대첩만 하더라도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30만 5,000의 병력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이라 하였다. '''30만 2,300명이 원정 한 번에 증발한 것이다.''' 전투병 30만이 증발하는 것은 지금도 뒷감당이 안 되는 손실인데 전근대에 대규모 원정을 갔다가 얻은 것 하나 없이 저런 참패를 당했으니 수나라의 손실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심지어 이것도 살수대첩이라는 전투에 한정해서 일어난 피해고, 요동에서 발목이 잡혀 수 개월동안 공성전을 벌였던 병력들의 손실까지 포함하면 전쟁 전체로 따졌을때는 더 많은 피해를 입었을것이다. 결국 수나라는 민심이 바닥을 쳤고 나중에가면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온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수나라의 민심은 연이은 대규모 원정실패와 그에 따른 인명이나 물자손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심지어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군량보급을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고,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다. 거기에는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도 끼어 있었다. 수 문제가 경제력을 키워놨고 수나라의 인구도 5,000만 명을 웃도는 수준이라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것이지, 수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면 반란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그 즉시 망해버리고, 심하게는 계승 국가마저 사라져 제국이 갈갈이 찢어져버렸을수도 있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을 갔지만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이 양제를 교살하여 처형했다. 이후 당국공 이연에게 옹립되어 양제의 뒤를 이은 [[공제(수)|공제]]가 [[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남북조를 통일한 첫 왕조로 위세를 떨쳤던 수나라는 건국 이래 고작 4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멸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