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도방위사령부 (문단 편집)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이전 === 수방사 이전에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들은 당연히 존재했다. [[1948년]] 창설된 [[수도기계화보병사단|(구)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사단)]]와 1949년 5월 12일 [[제7보병사단|(구)수도사단으로 승격한 7여단(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그것. (구)수도사단은 동두천과 포천 전방 경계를 맡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적의 [[보전#군사용어|보전]] 공격을 맞이했는데, 부실한 대전차 장비와 병력차[* 후방 예비대였던 3연대가 (구)수방사로 예속 변경되어 빠져나갔고, 대타로 25연대가 올 예정이었으나 주둔할 병영 문제로 후방에서 빨치산만 소탕하고 있었다.]로 [[동두천 전투|동두천]]과 [[포천 전투|포천]]에서 맥없이 밀려났고, 뒤이어 벌어진 [[의정부 전투]]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밀려 결국 [[서울특별시|경비할 수도]]까지 잃고 만다. (구)수도사단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던 수도경비사령부에게 1연대를 넘겨주고 일시 해체되었고,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는 지금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으로 재편되어 한국전 내내 활약했다. 하지만 두 사단은 ~~서울을 [[지못미|지키지 못한 죄]]로~~ 각각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동북부 일대에 머무르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정확히는 1955년 전후)부터 수방사가 창설된 [[1961년]]까지는 [[영등포]] 주둔 [[제6군관구사령부]] 및 그 예하 사단들([[제30기계화보병사단|30]], [[제17보병사단|33사단]](현 [[제17보병사단|17사단]]))이 서울의 방어를 담당했다. 수방사 창설 이후에도 군단급으로 증설되기 전까지는 한강 이북 도심([[청와대]] 포함)만 수경사(수방사)가 담당하고, 한강 이북 나머지 지역 및 한강 이남은 여전히 6관구사가 담당했다. 서울 도심은 수경사가, 외곽은 30, 33사단이 지켰다고 간주하면 쉽다. 지금은 30사단은 일개(?) [[제30기갑여단|기갑여단]]으로, 33사단(현 17사단)은 인천지역 위수사단이 되었지만, 수방사가 없었던 당시에는 각각 서울 북부와 남부(+인천을 비롯한 경기 서남부권)를 관장하는 거대한 부대였다. 17사단의 모 예하부대가 아직도 서울시 내에 주둔하고 있는 것도 그 흔적이다. (더욱이 17사단은 [[제51보병사단|51]], [[제52보병사단|52사단]]의 아버지나 다름없다. [[제17보병사단#s-1|해당 항목]]으로.) 참고로 당시 서울지역 [[예비군/대한민국|향토예비군]] 교육훈련은 30사단이 담당했다. 6관구사는 이후 경인지역방어사령부를 거쳐 오늘날 [[수도군단]]이 되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이름에 [[수도(행정구역)|수도]]가 들어가는 세 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수도군단]], 수도방위사령부)가 돌아가면서 서울을 지켜온 셈이다. ~~혼자 강원도로 간 7사단 지못미~~ 현 수방사의 [[제52보병사단|52]], [[제56보병사단]], 수도군단의 [[제17보병사단|17]], [[제55보병사단]], [[제1군단|1군단]]의 [[제30기계화보병사단|30사단]]이 옛 [[제6군관구사령부]]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