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동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파일:덕왕과이수신.jpg]]|| || 데므치그돈로브와 이수신 ||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이후 정부의 명령도 씹고 날뛴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장교들이 처벌은 커녕 승진하는 것을 본 일본군 내부에서는 한바탕 공을 세워 출세해보자 하는 야심에 물든 장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 제국]]은 수원과 차하얼 등 [[중화민국]]의 화북지역을 탐내고 있었는데 [[제1차 상하이 사변]]을 배후조종했던 관동군 정보과장 [[https://ja.wikipedia.org/wiki/%E7%94%B0%E4%B8%AD%E9%9A%86%E5%90%89|다나카 류키치]] 중좌를 비롯한 관동군 고급장교들은 내몽골 분리주의자 [[데므치그돈로브]]를 포섭하여 몽골 왕공들을 규합해 이들을 무장시켜 내몽골군을 조직했다. 이들로 하여금 소요를 일으켜 내몽골의 분리독립을 꾀하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물론 분리독립된 내몽골은 일본 제국의 괴뢰국으로 삼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1933년 8월, 관동군은 홍군 출신의 몽골인 이수신에게 그의 부대를 열하에서 차하얼으로 침입시켜 찰동특별자치구를 조직, 이수신을 행정장관 겸 군장으로 삼았고 10월에 백령묘에서 내몽자치정부를 발족시켰다. 한편 내몽골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왕공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1932년부터 [[장제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로부터 내몽골의 고도의 자치를 약속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33년 7월, 덕왕은 1차 자치회의를 백령묘에서 개최했으며 이때 일본은 덕왕에게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과 내몽골을 두고 경쟁하게 생긴 국민정부는 한발 물러나 차하얼과 수원에 몽골인들이 자치구를 만드는 것에 동의하고 1934년 4월 24일 [[허잉친]]을 지도장관으로, 조대문을 부장관으로 삼아 [[운왕]], [[데므치그돈로브]] 등 24인을 정무위원으로 하는 몽고지방자치정무위원회, 약칭 몽정회를 발족시켰다. 덕왕은 몽정회의 유지를 위해 장제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국민정부도 살림이 빠듯한지라 장제스는 돈을 보내주긴 했는데 보내주는 양이 시원찮았다. 설상가상으로 1934년 8월, 덕왕의 측근 한풍림이 베이핑에서 한간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와중에 일본은 덕왕의 휘하의 청년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고 덕왕에게 뇌물과 무기를 전달하는 등 덕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이었다. 덕왕이 국민정부에 기대를 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관동군 참모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다나카는 1935년 10월 데므치그돈로브를 몽정회에서 탈퇴시키고 12월에 이수신에게 차하얼성 보창을 습격하게 하고 고원, 장북, 상도 등 6개 현을 점령하게 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1936년 3월 수원성에 지방자치 정무위원회를 발족시켜 몽골왕족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일본은 5월 2일, 데므치그돈로브를 주석으로, 이수신을 부주석으로 하는 내몽골정부를 화덕에 설치하였고 산하에 흥아연합군단 2만명을 두었다. 다나카 류키치는 내몽골 특무기관장에 임명되어 수원성에서 소요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