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동사변 (문단 편집) === 기습한 몽골군의 패주 === 그러던 중 1936년 8월, 내몽골군이 백령묘에 집결하여 대량의 물자를 들인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국민정부는 수원성 정부주석 겸 35군장 [[푸쭤이]]에게 전보를 방비 강화를 지시했다. * 1. 장북현 일대에는 잡군이 5천명 정도 있고, 또한 이수신이 수동에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 전략은 먼저 편의대 및 지방의 불량배로 조직된 폭력대로 하여금 각지 관청을 점거시키고, 주둔군을 습격하는 것이다. 그 결과를 관망하여 다시 정식부대를 진격시킬 것을 계획하고 있다. * 2. 북덕위 군정부는 북덕성 동남의 비행장을 확대하여 비행기 200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발령했다. * 3. 데므치그돈로브, 이수신, 탁세해 등은 7월 13일 장춘으로 가 몽골군과 몽골기병 3천명을 편제, 그 편제비는 [[관동군]]이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비용은 수령 즉시 각지에 사람을 파견, 말 5천두를 사들이도록 하고 있다. 과연 [[11월 14일]], 이수신, 왕영 등이 지휘하는 기병과 보병을 합쳐 2천명의 내몽골군이 스스로를 대한의군(大漢義軍)이라 칭하고 국민정부의 타도를 선언, 비행기 8대, 산포, 야포 10여문을 이끌고 도림과 홍격이도를 공격했다. 중국군을 얕보고 있던 일본 측은 중국군이 금방 패퇴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1월 15일 밤, 폭설이 쏟아지는 혹한 속에서 푸쭤이는 즉각 1개 사단을 출동시켜 몽골군에게 결연히 맞섰다. 관동군이 비행기를 동원해 지원했음에도 몽골군은 순식간에 패퇴해 11월 18일에는 모두 백령묘로 도주했다. 이에 중국 전체가 오랜만의 승리에 흥분하여 열광하였고 각 언론은 몽골군 격퇴에 대해서 보도를 쏟아내었다. 11월 17일 국민정부는 담화를 발표하여 '중일교섭이 진전하느냐 마느냐는 일본 측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발표했고 장제스가 직접 뤄양에서 타이위안을 방문, [[옌시산]]과 회담하여 화북 통제를 강화했다. 11월 18일, 외교부 아주사장 고종무는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에게 수원성에 대한 일본 측의 공작이 계속되는 동안은 중일교섭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항의하며 방공에 대한 중일교섭을 연기하겠다고 통보했다. 11월 19일에 장제스는 제남에서 [[한푸쥐]]와 회담했다. 11월 21일 일본 외상 아리타는 수동사변과 일본이 관련없다는 외무성 담화를 발표했다. >"수동의 전투는 단순한 중국 국내의 사건으로 일본과는 관련이 없다. 임시로 일본인이 내몽골군에 강비해 있다 하더라도 이는 개인적인 행위로 보아야 마땅하며, 일본 정부 및 일본군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