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동사변 (문단 편집) === 백령묘 점령 === 항일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던 장제스 정부는 수동사변을 선전에 내세우기 위해 즉각 통제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푸쭤이를 수원성 동부 전선지휘로 삼고 [[옌시산]]으로 하여금 타이위안에 서북변방군사위원회를 설치, [[천청]]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또한 [[탕언보]]를 비롯한 중앙군 20만을 동원, 뤄양에 집결시켜 푸쭤이의 후방 지원부대로 동원했는데 [[장쉐량]]의 동북군은 배제되어 동북군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11월 20일~11월 24일에 걸쳐 몽골군은 3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면서 패주했다. 11월 23일 심야, 푸쭤이 산하의 산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백령묘를 공격했다. 몽골군은 저항도 하지 않고 도주했고 일본군 특무기관원들도 달아났다. 24일에 백령묘가 함락되었고 중국군은 대포, 소총 등 몽골군이 버린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하지만 푸쭤이는 [[진토 협정]]을 어기는 수준의 진군은 삼갔다. 이에 중국 전체에서는 곧 중국군이 진격해 차하얼과 열하를 탈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전국 각계에서 수원을 원조하자는 의연금 모집 운동이 벌어졌다. 고무된 국민정부 중앙정치회의와 행정원 내부에서도 중일교섭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라는 대일 강경론이 득세했다. 게다가 11월 21일 수동사변과 일본의 연관성을 부인한 외무성 담화와 달리 11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일본 육군무관 기타 세이치로부터 관동군이 내몽골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언질을 받아내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본은 더욱 망신을 당했다. ||이러한 승리는 전 국민을 기쁨과 흥분 속에 몰아넣었다. 전력을 다해 국가에 헌납하자는 헌금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우리 군의 백령묘 수복에 의해 관동군이 음모하고 있던 대원제국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이 조직에 투입한 금액은 5천여만원이 넘었으며, 이토록 힘을 쏟은 것은 백령묘를 수복 유일의 군사, 교통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계속 베이핑, 톈진에서 대량의 석탄과 밀가루를 사들여 백령묘까지 날랐다. 모든 연료와 식량도 백령묘 수복에 의해 모두 우리 손에 들어왔다.|| || 1936년 11월 뤄양 군관학교에서의 보고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