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레 (문단 편집) == 한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악3호분 차고.png|width=5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3.jpg|width=360]]}}}|| || {{{-1 '''[[고구려]] [[안악 3호분]](358 AD)'''에 그려진 고구려 귀족의 차고 속 수레들.}}} || {{{-1 '''[[신라]]의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 [[한국]] 또한 가까운 중국의 영향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고 확인된다.[* 중국은 이미 [[주나라]]때 부터 고대 전차를 이용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손무]]가 작성한 손자병법에 천자는 만승(전차 1만 대), 제후는 천승(전차 1천 대)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조선]]의 남산근 유적지의 남산근 101호[*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020.22020193542|초원에서 한반도까지]]] 무덤에서 [[고대 전차]]를 새긴 골판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지는 기원전 11~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 수레바퀴 조각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기원전 8~7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수레를 응용한 [[전차(고대 무기)|전차]]와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 보았을 때, 수레는 이미 그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은 기원전 30세기 전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기원전 20세기에 전차를 이용하여 대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고대에도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아마 늦어도 비슷한 시기에 전해져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대 서양은 군사력, 동양은 종교와 제사를 비롯한 샤먼이 주 지배 방법이였다는 차이 때문에 병기의 발전이 늦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수레 일체를 부장하는 중국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부속 금구만 해체되어 부장되는 특징이 고대 무덤에서 나타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363|고깔동기]]] 때문에 완전한 수레 실물 유물은 현존하지 않으나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수레모양 토기나 실제 수레의 부품 유물들, [[고구려]] [[고구려 고분군|무덤 벽화]] 속 수레 그림,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는 고대 [[도로]] 유적을 통해 수레가 어떤 형태였고 상당히 널리 쓰인 걸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8759502|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장영실]]이 만든 [[세종(조선)|세종대왕]]의 수레가 유명하다. 이 수레가 파손되어 세종대왕이 크게 다칠 뻔했기에 장영실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앞뒤에서 지탱하는 외바퀴 구조인 초헌이다. 이 일화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마(탈것)|가마]]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을 보면 수레가 맞다. 또한 [[바퀴(도구)|바퀴]] 문서에서 보듯 근현대 시기와는 달리 바퀴와 수레는 문명 발전에 필수적이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21세기 현대에도 대륙간 물류의 제왕은 수운이지, 육로 운송이 아니다. 괜히 1000년 전에 내륙지방이 문명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들이 (인도 북부 내륙지방, 중앙아시아 등) 점점 연안지방에게 경제적 지위를 내주고, 괜히 러시아가 아직도 [[우크라이나]]의 [[세바스토폴]] 같은 [[부동항]]에 목숨 거는 게 아니다. 문화권에 따라 바퀴는 보조적으로 사용하고, [[선박]]이나 [[말(동물)|말]]을 선호하는 곳도 매우 흔했다. 조선 역시 그러한 국가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큰 [[강]]과 연안 항로를 이용한 수운이 국가 물류 운송의 중핵이었고 수레는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좁은 땅에 산과 하천이 너무 많아 전근대 조선의 비포장도로에선 수레는 운송량은 수운에 훨씬 못미치면서 귀한 소와 말을 집단 폐사시킬 위험성이 높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로를 닦을 자금을 마련하려면 세금을 많이 거두거나 외국을 침략하고 약탈해야하는데, 민본주의 조선에서 그런 건 좀처럼 시행하기 어려웠다. [[운하]], [[도로]] 항목에도 자세히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수레 도입 주장 역시 이러한 현지 사정, 즉 나라마다 고유의 지형적 차이를 감안하지 못한 주장이라는 견해가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조선 지배층 일각에서 제기된 수레 보급 제한 움직임을 문제시하기도 하나, 이 때의 수레는 운반용 수레가 아니다. 신분제 질서 아래에서 고위 관료들이 권위를 나타내는 [[의전]] 용도로 탑승하던 이동용 수레를 아래 신분들이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하자는 논의일 뿐이다. 농민들이 흔히 쓰던 소[[달구지]]나 종2품 이상 [[당상관]]들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타고 다녔던 초헌 등이 모두 수레로 뭉뚱그려지기 때문에, 고문헌에서 '수레'라고 하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범주를 제대로 좁힐 필요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