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아송 (문단 편집) == 역사 == [[중세]] 초기(5 ~ 8세기)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는데, '''서로마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불리는 [[아에기디우스]]와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프랑스 북부의 [[로마인#s-2]]들과 --이교도-- [[게르만]] 세력과 항쟁할 때에 거점으로 삼은 도시이다.[* 일명 [[수아송 왕국]]] [[수아송 전투(486년)| 486년에 도시 근교에서 시아그리우스를 패배시킨]] [[프랑크족]]의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수아송은 게르만화되었고, [[살리카법]]에 의거하여 4개로 갈라진 프랑크 왕국의 영토 중 하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752년에 [[카롤링거 왕조]]의 개창자인 [[피핀 3세]]가 [[교황]]의 주임하에 대관식을 치른 곳도 바로 이곳 수아송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 서프랑크의 중심지는 [[파리(프랑스)|파리]]로 굳어졌다. 다만 923년 6월 12일에 여자 문제로 귀족들과 대립하게 된 [[샤를 3세]]가 국왕군과 (자신이 허가해준) [[노르망디 공국]]군을 이끌고 [[수아송 전투(923년)|수아송 인근에서 귀족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감옥에 갇힌 채로 929년에 옥사하기도 하였다. 12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조슬랭 드 수아송이 도시의 주교였는데,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 특히 피에르 아벨라르와 논쟁하며 유명해졌다. 또한, 조슬랭 주교는 중세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https://youtu.be/2e55kHFBPk4]] [[수아송 전투#s-3|1918년 7월에 프랑스 - 미국의 연합군이 철도 거점인 수아송을 점거한 독일군과 크게 싸우기도 하였다.]] 이렇듯 수아송은 [[독일]]의 파리 진격로에 위치하여 양차 세계대전 시에 크게 파괴되었으나 대부분 복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프랑스의 건축가인 장 미셸 빌모트가 이곳 출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