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창궁 (문단 편집) === 고려 왕조 ===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지는 미상이다. 1011년([[현종(고려)|현종]] 2년) 2월에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 갔던 [[청주시|청주]]에서 [[개성시|개경]]으로 돌아와 당시 전소된 [[만월대]]를 복구하는 동안 기거했으나, 1116년(현종 7년)에 수창궁 안에 기괴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되자 결국 [[명복궁]]으로 이어했다. 그 뒤 1147년(의종 1)에는 군소배가 [[의종(고려)|의종]]과 어울리자 어사대의 건의로 북문을 봉쇄해 군소배의 출입을 금하기도 하였다. 그뒤 내시 윤언문이 수창궁 북쪽에 매우 화려한 만수정을 설치하면서 북쪽으로 권역이 확장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1181년([[명종(고려)|명종]] 11) 수창궁에 돌이 날아들어와 계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187년(명종 17) 정월에는 추밀원에서 불이 번져 수창궁의 행랑 기둥 20여 채가 불에 탔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치사공부상서 [[조원정]]의 가신 무리 70여 명이 수창궁에 들어와 추밀사 양익경과 내시원낭중 이규ㆍ이찬 등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다. 1196년 4월에는 수창궁 중서성문이 무너졌으며 8월에는 1171년 10월 화재 이후 기거했던 수창궁을 떠나 [[연경궁]]으로 옮기었다. 1211년(희종 7) 12월, 수창궁에서 희종의 최충헌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최충헌의 호위대는 다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최충헌을 죽이는데 실패했다. 1213년(강종 2) 8월에 [[강종(고려)|강종]]이 수창궁 화평전(和平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220년(고종 7) 4월에는 수창궁 침전에 [[호랑이]]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1232년, 무신정권 집권자 [[최이]]의 결정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게되었다. 강화도엔 수창궁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새로운 별궁을 지었다. 개경 수창궁은 폐쇄 되었다. 1234년 11월에 [[태조(고려)|태조]]의 신어[* 神御 : 임금의 화상. [[어진]].]를 개경 수창궁에 봉안했고 1250년과 1251년에는 [[몽골]] 사신을 강도(江都) 수창궁에서 향연하기도 하였다. 이후 몽골과의 [[여몽전쟁]]으로 본토가 황폐화되면서 개경 수창궁은 폐허가 되었다. 1270년, 본토로 출륙할 때 강도 수창궁은 허물어졌다. 1297년([[충렬왕]] 23) 윤12월에는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이 부지밀직사사 최충소에게 명해 수창궁 터에 장차 원공주가 기거할 궁려를 짓기 위해 큰 공사를 시작했는데 가운데에 방단을 쌓고 둘레에는 높은 담을 둘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연경궁]](본궐)이 불타 이 곳으로 옮기었으며 1370년 8월 다시 수창궁 옛 터를 보고 궁궐 짓기를 명하였다. 그러다가 [[공민왕]]의 시해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381년(우왕 7) 3월 수창궁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최영]], 이성림 등에게 공사를 계속 담당하게 해 다시 수창궁을 경영해 1384년 윤10월에 수창궁의 낙성을 보게 되었다. 1388년 [[창왕]] 때 왕의 이름 창(昌)을 [[피휘]]하여 수창궁을 수령궁(壽寧宮)으로 개칭하고 대비 이씨를 옮기었다. 그 뒤 [[공양왕]]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창왕은 폐위된 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신돈]]의 핏줄로 모함당해 아예 그런 왕이 있었다는 것까지 부정되어 피휘도 취소됐고 궁 이름은 다시 수창궁으로 돌아왔다. '''1392년 7월 17일, 감록국사 이성계가 수창궁 정전에서 군주가 되었다.''' 그 이전인 7월 12일, 공양왕이 왕대비의 교령에 의해 북천동궁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이성계는 왕대비의 교령으로 감록국사에 봉해졌다. 이성계는 [[만세]] 함성을 들으며 수창궁 서쪽으로 말을 타고 들어와 어좌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조하를 받았다. 왕씨가 아닌 이씨가 고려 법궁을 차지하는 순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