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명여자대학교 (문단 편집) == 연혁 == > '''대한제국 황실이 1906년에 설립한 최초의 민족여성사학, 숙명여자대학교.'''[* 그러나, 설립에 필요한 자원을 지원했을 뿐 실제 설립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또한 순헌황귀비 엄씨의 개인 차원에서 지원일 뿐 '대한제국 황실' 차원의 지원 역시 아니다.] [[1906년]] [[용동궁]][* 오늘날의 [[종로구청]] 동쪽 건너편 자리]에 세운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모태로 삼는다.[* 물론 당시에는 대부분의 당시 사학들이 그렇듯, '있는 집 자녀들을 가르치는 학원' 정도의 개념이었다.] 설립 지원자는 [[순헌황귀비 엄씨]]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의 영향하에 있던 경선궁과 영친왕궁에서 지원한 농경지 수익금을 재원으로 1912년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설립되었다. 1기는 단 5명의 여학생만으로 출발했다. 초대 교장 이정숙은 순헌황귀비가 총재를 맡았던 한일부인회에서 회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정숙이 실제 설립자라는 말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설립한 걸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한편 [[순헌황귀비 엄씨]]와 그녀의 친정인 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와 [[양정의숙]]도 세웠다. 후에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숙대입구역]]부터 숙명여대 정문까지의 길인 청파로47길이 '순헌황귀비길'의 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현재 쓰이는 '숙명(淑明)'이라는 명칭을 달고 본격적인 민립 여성교육기관으로 정립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 지식층이 주도한 숙명여전 설립 모금 운동이었다. 그렇게 건립된 당시 명칭은 숙명여자전문학교였으며, 학교 부지는 구황실 소유지 가운데 용산 청파동 일대 20,000여㎡(현재의 숙명여대 제1캠퍼스 부지)였다.[*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과 사무를 담당하던 한시적 기구인 이왕직(李王職) 장관이 1938년 5월 20일 현 숙명여대 본관 일대 20,000여㎡를 학교 부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승낙하였다. "용도는 학교 부지이고 임대료는 무료다. 학교 부지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25/2014012500212.html|#]] ] 초대 교장으로는 전직 [[경성제국대학]] 교수였으며 당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었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가 부임하였다.[* [[일본]]의 역사학자로서 1899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한국에 파견되어 [[조선총독부]] 학무국 근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법문학부 조선사학 강좌 교수를 역임했다가 경성제대 정년퇴임 이후 숙명여전 교장으로 부임했다. 숙명여전 교장으로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왕직의 촉탁으로 조선역사에 관한 교과서 편찬, 수사사업, 고적조사 등의 사업을 지휘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48년 5월에는 미군 군정청에 의하여 대학 승격을 인가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동대신동에서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서울 지역이 다시 수복되자 1953년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5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총장으로는 숙명여전 교장이었던 임숙재가 취임하였다. 1964년~1966년에는 계속하여 학내분규가 발생하였다. 그 사유는 제4대 총장인 김순식에 의한 신입생 부정입학,[* 1964년 10월 21일 32명의 교수가 김순식 총장이 부정하게 신입생 입학과 건물 신축을 결정했다며 총장 사임과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고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하였다. 그 후 11월 19일 32명의 교수 중 5명의 해면이 결정되자 일부 학생들이 가담하여 농성을 계속하였고, 11월 23일 김순식 총장은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무기한 휴교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1965년 1월 21일 김순식 총장이 사임하였다.] 제5대 윤태림 총장의 횡령, [[영친왕]]과 [[이방자]]의 차남인 [[이구(1931)|이구]]의 숙명학원 경영권 주장 등이었다.[* [[일본]]에 머물다 1963년 부모인 [[영친왕]]·[[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한 [[이구(1931)|이구]]는 본인이 숙명학원 설립자([[순헌황귀비]])의 직계 손자이며 황귀비의 재산으로 설립된 재단인 만큼 본인에게 재산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현 숙명학원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현재 이사진을 교체하고 내가 선임하는 인사에 학교 경영권을 주어야 한다"고 문교부와 국회 문공위에 청원했다. 문교부는 이에 행정권을 발동해, 숙명학원 일부 이사진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내고 이구가 지목하는 인물로 이사를 임명하는 등 직접 개입했다. 숙명학원의 기존 이사진과 이구 측 이사들, 국회 문공위와 문교부 관계자들은 1년 이상 서로 책임을 물으며 분규를 계속했고, 숙대의 준[[국립대학]]화 등 논의가 이어지다 결국 1967년 제3의 인물들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분규가 마무리됐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nNewsNumb=201302100022&page=16|#]] ] 1968년[* 이때 [[김신조 사건|김신조 등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제6군관구사령부]] 사령관이 [[한강]] 이북 방위선을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숙명여대가 소유한 관악구 [[남현동(관악구)|남현동]] 토지를 강제 점유하자, 숙명여대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4차례에 걸쳐 점유당한 토지를 전국에 산재한 국방부의 유휴지로 환지 받았다. 1981년에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었던 [[김옥렬]] 교수가 최초의 숙명여대 출신 총장으로서 부임하였다. 김옥렬 총장은 1991년 국방부가 소유한 B지구(현재의 제2 창학 캠퍼스)의 토지 일부를 취득하였다. 1994년에는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이경숙(1943)|이경숙]] 교수가 교수 직선으로 제13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이경숙 총장은 현재의 [[약학대학]] 뒤에 위치한 국유지의 공원부지 지정을 해제하고 매입하여 제2 창학캠퍼스를 조성하였다. 그 후 2008년까지 제2창학을 표방하며 재임한 이경숙 총장[* 퇴임 직전에 [[이명박|제17대 대통령]] 인수위원장을 역임했다.] 시절에 학교 인프라가 상당히 발전하였다.[* 한편 그 기간 동안 재학생들은 심--유니버--시티를 체험해야 했다. 한 학기에 도서관을 포함해 주요 건물 3군데가 공사한다든가.] 2012년에는 기부금 편법운용 등을 이유로 한영실 총장과 재단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다. 이 분규는 2012년 9월에 황선혜 총장이 부임하면서 마무리되었다. 2013년에는 [[숙명여자중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숙명학원에서 분리되어, 명신여학원이라는 재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숙명학원은 숙명여대만을 운영하는 단독법인이 되었다. 한편 황선혜 총장은 2013년 [[공과대학]] 창설을 선언하였고, 201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에 이어 [[여자대학교]]에서 2번째로 숙명여대에 공과대학을 신설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