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정문 (문단 편집) == 특징 == 일단 4대 성문 중 북문이지만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산 속에 지어진 탓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시대에도 성문의 기능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과 숙종 대에 만든 홍지문이 북문으로 실제 '북쪽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로서의 기능을 대신했다. 일례로 도성 각 대문의 바깥을 교(郊)라고 해서 동교, 서교, 남교 등으로 불렀는데, 북교만은 창의문 바깥을 뜻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을 의미하기도 해 기피대상이었던 것이 이유였다. 북쪽 문을 열어두면 여자들의 음기가 세진다는 이유로 풍수지리에서는 북쪽에 문을 놓지 않거나 놓더라도 일부러 왜소하고 좁게 지어놓고 닫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숙정문이 '''산 속에 지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경복궁 신무문]]도 숙정문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지어졌다. 즉 음기를 쫓기 위해 숙정문은 무늬만 북쪽의 대문 형태로 취해놓고 닫아둔 다음, 실질적인 입구의 역할은 다른 문들이 대신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애초에 잘 열지도 않던 문인데,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이 문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며 상소를 올려 그 뒤로 소나무로 길까지 막았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자리까지 옮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옮겼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렇게 기피되는 문이다 보니 북대문(北大門)이라는 별칭도 당연히 붙지 않았다. 사실 '''"북대문" 자체가 최근에 와서야 붙은 별칭이다.''' 태조실록 1396년 9월 24일조를 보면 각 성문의 정식 명칭을 붙이면서 동대문, 남대문 등의 속칭을 일일이 붙여 주는데, 숙정문은 이때 아무 별칭도 안 붙은 쪽이었다. 현재의 현판은 1976년 문루 복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은 한문 가로쓰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