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고려) (문단 편집) == 가족관계 == 숙종은 1명의 왕후와 결혼했으며, 이는 고려 왕조의 다른 왕들이 적어도 후궁을 1명이라도 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헌종, 충목왕, 충정왕, 창왕은 제외. 명의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7명, 딸이 4명으로 총 11명이 있었다. 하지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279|귀법사 적소수좌 현응 묘지명]](歸法寺 寂炤首座 玄應 墓誌銘)에 따르면 귀법사 주지 [[현응(고려)|현응]](玄應)이 숙종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의왕후]]의 소생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명의왕후 외에 최소 한 명의 다른 왕비가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좌”라는 시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서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제1비: [[명의왕후]] 류씨 - [[류홍(고려)|류홍]]의 장녀 * 태자 왕우(王俁): [[예종(고려)|예종 문효대왕]] 태자 왕우, 즉 미래의 [[예종(고려)|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자랑해 동생들을 누르고 그들의 근신들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숙종의 둘째 아들 [[상당후|상당후 왕필]]이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었으나 1098년에 사망했다. 막내 남동생인 [[통의후|통의후 왕교]]는 22세인 1120년에 사망했다.[* 1098년 생으로 예종의 동생들 중에선 유일하게 생몰년이 확실하다.] 사실 예종도 쉽사리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부왕인 숙종의 치세 때 예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부여공|부여후 왕수]]가 대놓고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에 얽혀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예종 역시 맏아들이었음에도 고려는 왕위의 형제 상속이 가능했기에 마음 놓고 지낼 순 없었다. 이후 예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손자였던 [[인종(고려)|인종]]은 작은 아버지들과 그 근신들을 제압하지 못하면서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즉위한다. 숙종의 아들들은 모두가 적자인데다가 고려는 형제 상속이 더 선호되다 보니 나이가 어린 인종의 입지는 더욱 작아졌다. 당장 조부였던 숙종조차도 형제 상속을 주장하며 왕위를 조카인 [[헌종(고려)|헌종]]에게서 뺏어왔고, 심지어 조정 내에서 별다른 반항도 없었다. 인종의 근신인 [[이자겸]]은 이런 숙종의 왕자들과 끝없는 정쟁을 벌여 결국 승리하고, 뒤이어 막강한 권력을 잡게 된다. * [[상당후|상당후 왕필]](王佖) * [[징엄|원명국사]] 왕징길 → 왕징엄(王澄儼) * [[왕보(대방공)|대방공 왕보]](王俌) * [[대원공]] 왕여 → 왕효(王侾) * [[왕서(제안공)|제안공 왕서]](王偦) * [[통의후|통의후 왕교]](王僑) * [[대령궁주]](大寧宮主) - [[회안백|회안백 왕기]][*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와 혼인 * [[흥수궁주]](興壽宮主) - 승화백 왕정(承化伯 王禎)[* [[낙랑공|낙랑공 왕영]]의 장남]과 혼인 * [[안수궁주]](安壽宮主) - [[왕원(광평공)|광평공 왕원]][* [[조선국 양헌왕|조선국 양헌왕 왕도]]의 차남]과 혼인 《고려사》 공주열전엔 안수궁주(安壽宮主)로, 《고려사》 종실열전에는 안수공주(安壽公主)로, 남편인 [[왕원(광평공)|광평공 왕원]]의 묘지명에는 순정공주(順貞公主)로 기록되어 있다. * [[복녕궁주]](福寧宮主) - 진강백 왕연(晉康伯 王演)[*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과 혼인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199|복녕궁주는 묘지명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의 넷째 딸이며 진강백(晉康伯) 왕연(王演)[* [[문종(고려)|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에게 시집갔다. 궁주는 묘지명에서 '왕희'(王姬), '종실현녀'(宗室賢女), '천자지녀'(天子之女)란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 38세에 죽었으며, 묘지명엔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향'은 황제가 아닌 '상제의 고향'을 말한다. 고려시대 왕족의 죽음에 단골로 등장하는 비유이다. 후대 [[명종(고려)|명종]]의 《애책문》[* 애사(哀辭)의 일종으로 왕과 왕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글]에도 이 비유가 나온다. 숙종의 딸은 모두 [[종실]]들과 혼인하였다. * 제2비: 미상 * [[현응(고려)|적소수좌 현응]](玄應) - 모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숙종의 아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