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신라]]의 제41대 [[헌덕왕]] 김언승, [[조선]]의 제7대 [[세조(조선)|세조]] 이유처럼 [[애장왕|조]][[단종(조선)|카]]의 왕위를 빼앗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일단 즉위한 후 본인의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많은 업적을 남겨서 옥좌에 오른 이후 훈구파 등 부패 세력들을 양성하여 조선의 정치를 썩게 한 세조와는 달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가 대부분 반박을 당한 세조 이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변호들이 정작 숙종 왕희에게는 정말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조선의 [[태종(조선)|태종]] 이방원과 [[세조(조선)|세조]] 이유를 비교하면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광종(고려)|광종]] 왕소와 비교하며 숙종 왕희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이다. 광종은 피의 [[개혁]]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 [[정치]]를 행하여 [[외척]]이나 [[권신]]들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여기에다 20세기 후반의 고려사 [[연구]]자 중에서는 숙종이 시작한 [[여진족|여진]] 정벌마저 '''국내 정치의 난맥을 수습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 엄청난 [[삽질]]'''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서울특별시|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에 《[[고려사]]》에는 이 때에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쳐 유랑민이 된 경우였다. 근신 정치로 인해 숙종 다음 [[예종(고려)|예종]] 시기부터 [[경원 이씨]][* 인천 이씨 또는 인주 이씨]들이 득세하며 [[문벌귀족]]의 고착화가 심해져 그의 손자인 [[인종(고려)|인종]] 대에 여러가지 혼란이 찾아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부왕 [[문종(고려)|문종]] 대부터 있어 왔던 경향이며, 오히려 숙종보다는 문종이 경원 이씨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자연(고려)|이자연]][* 아이러니한건 문벌귀족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자연은 [[이자의]], [[이자겸]] 등 [[왕실]]에 반란을 일으킨 [[후손]]들과는 달리 철저히 [[신하]]로서 문종을 보필해 여러 [[정책]]에 참여했고 인품 역시 훌륭했다.]을 등용해 [[힘]]을 실어주는 등 대놓고 문벌귀족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문벌귀족 세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모두 문종의 탓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은데 문제의 근원만 따지고 보자면 오히려 고려 초기인 [[성종(고려)|성종]](제6대) 때부터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진 정책은 완안부 여진족의 팽창[* 여진족이 고려의 변경을 먼저 침]으로 고려의 변경이 위험해졌으므로 숙종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 일단 집권할 때부터 이자의와 그 끄나풀들을 철저히 [[뿌리]]뽑아서 경원 이씨의 득세에 제동을 건 장본인도 바로 숙종이었다. 집권한 후부터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도 [[화폐]]를 제조하거나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시키고 [[승려]]가 된 동생 [[의천]]을 통해 [[불교]]를 통합하려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기도 하다. 숙종과 대립했던 이자의에 대해 살펴보면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 이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자의의 [[반란]]과 [[숙청]]으로 경원 이씨의 기세가 한 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숙종 사후 3년 뒤 예종이 자신의 2번째 왕후로 [[문경태후|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의 전횡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예종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은 강성 [[군주]]라서 이런 전횡이 벌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종은 도리어 아버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는데 앞서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마저도 정작 예종 시기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작 백관들은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이것도 무시하고 강행 처리를 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막강했다. 반면 다음 [[왕조]]의 국왕인 세조는 숙종보다 왕권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이후 세조 다음의 왕들이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왕들로 전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쓰디 쓴 평가를 듣는다. 더욱이 숙종은 위협이 될 만한 일부 척신들만을 제거했을 뿐 신하들을 그렇게 도륙내지는 않았던 반면 세조는 [[집현전]] 출신 [[사대부]]들이 [[사육신#s-3|단종 복위 운동]]에 많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아예 집현전을 해체시켜버리는 치명적인 실책까지 저지르며 악평을 듣게 된다. 사실 [[고려]]의 왕과 [[조선]]의 왕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 자체가 다르고 환경, 사상, 정치적 배경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고려는 [[중세]]와 [[근세]]를 잇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있던 국가이고, 조선은 과도기를 지난 근세의 국가이다. 이는 마치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를 단순 비교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단순히 [[재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조와 숙종 모두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본처에게만 충실한 [[애처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숙종은 정실 [[왕후]]인 [[명의왕후]]만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무려 7남 4녀를 보았다. 세조 역시 [[대군]] 시절 [[첩]]으로 들였다가 즉위 이후 격상한 예를 제외하면 후궁을 새로 들이지 않고, 정실인 [[정희왕후]]에게만 충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