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당) (문단 편집) === 대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붕어하다 === 758년 정월, 숙종은 연호를 건원(乾元)으로 바꾸고, 2월에 천보 3년 이후 '년'(年)을 '재'(載)로 세던 것을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이렇게 758년은 건원 원년이 되었다. 하지만 범양절도사로 봉해졌던 사사명을 팽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들통나면서[* 이때 사사명은 이광필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이 그걸 들어줄 리 없었다.] 사사명이 범양에서 재봉기하게 되었고, [[업]]의 안경서가 구원되었으며, 그걸 막으려던 600,000명의 당군이 지휘관 부재로 130,000명의 사사명군에게 [[사사명의 난#s-3.1.1|안양하 전투]]에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에 숙종은 (모함 등의 이유도 있지만) 곽자의를 원수에서 물리고 [[삭방절도사]] 겸 병마원수에 이광필을 임명했다. 한편 사사명은 759년 3월, 사용 가치가 끝난 패륜아 안경서를 참살하고 스스로 연나라의 제3대 황제를 자칭하며, 이미 죽은 안록산을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761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사사명을 죽이고 제4대 황제에 올랐다. 이런 와중에도 당나라는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는 군권을 장악한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 등에 의해 조정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보국은 760년 현종의 남아있는 영향력을 두려워하던 숙종 주위의 분위기를 이용해 흥경궁의 현종을 감로전에 유폐시키고, [[고력사]] 등을 귀양시켰으며, [[안진경]]을 좌천시켰다. 숙종이 현종의 유폐를 반대했으나 이미 막을 수 없었고, 현종에 대한 알현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숙종은 병이 났고, 점점 깊어만 갔다. 762년 5월 3일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종이 감로전에서 붕어했다. 이 상황속에서 이보국과 손을 잡고 있었던 장황후가 환관 단항준, 숙종의 둘째(차남) 황자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 궁인(宮人) 손씨(孫氏)의 소생.][*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장황후는 월왕 이계에게 "자신과 손을 잡으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제안을 했으며 월왕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와 공모해 5월 16일, 이보국과 태자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했으나, 이들의 음모는 이보국에게 발각되어 유폐되었다.('''보응정변''') 이 충격으로 숙종 역시 5월 18일에 붕어하고[* 숙종이 독살당했다는 가설이 있다.] 5월 20일 태자인 이예가 즉위하니 그가 [[당대종]]이었다. 한편 환관 이보국은 대종의 즉위 과정에서 장황후와 월왕 이계, 연왕 이한(兗王 李僴)[* 숙종이 태자 시절에 이혼한 폐태자비 위씨의 아들이었다. 숙종에게는 6남이었다.]을 참살해 위협을 제거하고, 당숙종은 물론 당대종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도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으나, 손을 잡았던 환관 정원진에 의해 1개월 만에 실각하고 몇 달 뒤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보국은 '''환관에 의해 황제가 옹립되는''' 최초의 기록을 세우면서 앞으로의 환관 세도, 즉 중국 역사상의 '''제2차 환관시대'''를 예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