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개요 ==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조선)|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무이한 [[조선/왕사|임금]]이다.[* 조선 왕실에서 장남의 수난은 적장자와 서장자를 가리지 않았다. 조선 왕실에서 왕위에 오른 장남은 숙종을 제외하면 [[문종(조선)|문종]], [[단종(조선)|단종]], [[연산군]], [[인종(조선)|인종]], [[현종(조선)|현종]], [[경종(조선)|경종]], [[헌종(조선)|헌종]], [[순종(대한제국)|순종]] 8명뿐이다. 문종과 인종은 모두 병으로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 가서 세상을 떠났고 [[연산군]]과 [[단종(조선)|단종]]은 각각 [[중종반정]]과 [[계유정난]]으로 [[폐위]]당했다. [[현종(조선)|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아버지 [[효종(조선)|효종]]의 [[조선/왕사|왕위]] [[정통성]] 문제인 '''[[예송논쟁]]'''에 휘말리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헌종 역시 2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결정적으로 순종은 [[경술국치]]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불운했던 운명의 장남이 다수 존재한다.([[진안대군]], [[양녕대군]], [[의경세자]], [[월산대군]], [[복성군]], [[순회세자]], [[영창대군]], [[소현세자]], [[효장세자]], [[문효세자]], [[효명세자]])][* 사실 숙종도 불운을 깨부쉈다 할뿐이지 인생사는 그닥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10~30세 사이의 개인사는 조선 군주치고도 생각보다 불행한 편이었다. 먼저 14살에 친할머니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는데 인선왕후는 사망 당시 54살로 당시 기준으로 단명한 편은 아니나 정작 아버지 [[현종(조선)|현종]]이 당시 기준이나 현재로나 매우 젊은 33세의 나이로 6개월 뒤에 친할머니의 뒤를 따라 [[요절]]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인 20살이 된 1680년에는 [[경신환국]]으로 인해 본인과 친한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 귀양과 사약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는 딸까지 낳을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동갑내기 조강지처이자 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 [[명성왕후]]로 인해 반강제로 3년상도 제대로 못치른채 계비 [[인현왕후]]를 맞이했다. 그러다 3년 후 23살에는 어머니 명성왕후가 아들인 숙종의 [[천연두]]를 낫게 한다고 무속신앙에 기대어 찬물세례를 받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으며, 5년 후 28살이 된 1688년에는 본인이 좋아하던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오랜만에 자식을 갖게 되었지만 출산 1개월여를 앞두고 피가 안섞였지만 숙종과 사이가 좋았던 적증조할머니이자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몸이 병약했던 13~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왕족이면 보다 빨리 후사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12세에 [[조혼]]을 시켰지만 손(孫)이 급하지 않은 일반 양가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을 시켰고 [[과거]]에 응시해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이 된 아들의 집안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숙종(조선)|숙종]]은 14세(만 13세)여서 조선의 기준으로도 아직은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친정|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왕사|조선 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장렬왕후|어]][[인선왕후|른]][[명성왕후|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조선)|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했던 중흥 군주이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장희빈|희빈 장씨]]이다. 집권 기간 동안 정사를 멀리하고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을 탐닉했던 국왕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었으며 [[자식]]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이 여자와 관련한 문제가 가득한 임금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재위 기간 동안 [[원경왕후|원경왕후 민씨]]와 후궁을 들이는 문제로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나 집안 문제를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않았던 [[태종(조선)|태종]]과는 반대로, 이는 숙종의 냉혹한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숙종과 비슷한 사례로는 [[영국]] [[튜더 왕조]]의 [[헨리 8세]]가 있다. 숙종보다는 실생활에서도 바람둥이 기질이 강했지만 부인과의 관계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건 동일했다.][* 다만 숙종은 헨리 8세와 달리 정비인 [[인경왕후]]와는 끝까지 사이가 좋았고, 그녀 생전에는 장희빈을 비롯한 궁녀들이나 후궁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모두 요절했지만) 자식도 여럿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