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정유독대와 최후 ===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경종(조선)|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조선/왕사|후사]](後嗣)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 교체는 그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 정작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경종의 정통성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고, 경종 본인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경종이 한 발언은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가 거의 전부일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경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딱히 거둔 성과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실책을 저지른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폐세자가 곤란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丁酉獨對)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역사)|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관례상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조선)|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조선)|경종]] 치세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경희궁 융복전]]에서 [[죽음|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왼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오른쪽 눈 역시 잘 안 보이게 되었으며 [[복수(동음이의어)|복수]](腹水)[* 배에 물 또는 고름이 차서 밥을 먹어도 그대로 뱉어버리는 심각한 증세이다.]가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계비 [[인원왕후]]와 [[경종(조선)|세자]], [[영조|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엎드리며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피를 토하고 끝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