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특징 == * 왕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업적을 남긴 왕이지만 백성의 삶에 도사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 왕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도 46년이란 기간을 놀고 먹었다고 비난하기는 근거가 빈약한데 이미 [[균역법]]의 근거가 되는 여러 조사들이 숙종 말년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지적니 많다. 균역법이 남자 1인당 포 2필이던 것을 1필로 줄인 것인데 조선의 군포를 모두 포 2필로 동결시킨 것이 바로 숙종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 부왕 [[현종(조선)|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 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말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르니 그 결과는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또한 숙종은 [[태종(조선)|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외척]]을 척결한 태종과는 다르게 외척에 많이 의지했다.[* 숙종은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민시중,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조사석,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오두인, 민진후, 민진원, 조태채, 민진장, 민진주, 조태구, 조태억 등의 외척들을 중용했다.][* 다만 숙종은 [[장렬왕후]]의 사망 이후부터는 [[기사환국]]을 통해 본인도 맘먹으면 외척을 내칠수 있다는걸 증명하였다. 오히려 붕당 간의 화합을 무너뜨리며 훗날 외척의 발호 여지를 남겼다는것.]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와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의의는 크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고는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 숙종의 환국 정치는 마지막에 남아있던 붕당의 마지막 건전성을 날려버린 것 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그 이후에 탕평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영조와 정조가 최소한의 왕의 자질은 있는 이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심지어 정조가 펼쳤던 준론 탕평은 '''그''' 우수했던 정조마저 과로로 일찍 죽을 정도로 정치환경을 초토화시켰고 군주 하나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시스템으로 기울었다. 한 마디로 숙종이 뿌린 씨앗에 의해 '''군주 한 명의 자질에 완전히 좌지우지될 정도로 조선의 통치 시스템이 망가져 버렸다는 소리'''. 결국 후임 국왕들(영조, 정조)은 쑥대밭이 된 조선의 통치시스템을 어떻게든 다시 굴러가도록 즉위기간 내내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그나마도 정조는 그 시스템에 의한 과도한 업무량으로 결국 과로사하면서 그것이 지속가능하지 못한 시스템임을 손수 입증해버렸다. 결국 두 왕에 못 미치는 왕재인 [[순조]],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 책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숙종이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는 혹평을 면하기가 힘들다. 자세한 항목은 [[정순왕후(조선 영조)|영조비 정순왕후]]의 평가 항목 참조. * 승하할 때까지 46년(정확히는 45년 10개월)[* [[고려]] 시대의 [[고종(고려)|고종]] 역시 정확히 45년 10개월이나 왕위에 있었다.]을 다스렸다. 이는 아들 영조의 재위 기간인 52년(51년 7개월)에 맞먹는 것이며 조선 [[국왕]] 중에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인물이다. 숙종과 영조 부자가 합쳐 조선 왕조 500년 중 100년 가까이 재위했으며 경종까지 포함한다면 (4년 2개월) 100년이 훌쩍 넘는 재위 기간이다.[* 비슷한 시기 [[청나라]] 강희제(61년)와 건륭제(60년)가 121년 재위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숙종과 영조는 부자지간이지만 [[강희제]]와 [[건륭제]]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다.] 재위 기간이 40년 이상인 왕은 이들 외에는 둘뿐으로 [[선조(조선)|선조]]가 41년(40년 8개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43년(43년 7개월)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영조와 정조보다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숙종 치세는 전란으로 감소한 조선의 국력이 거의 수습된 시대였고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며 [[화폐]] 유통 경제가 정착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기라서 조선 [[경제]]사에서는 의미가 매우 큰 시대다. *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와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 신앙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제사에 참석해서 술을 따르고 4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 이 때 숙종이 '선조 대왕도 임진왜란 후에 사배(四拜)를 드렸다'라는 전례를 근거로 들었는데 선조는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준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데 반해 숙종은 진심으로 [[빠돌이]] 마음가짐이었다.]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관우 사당인 동묘는 무속 신앙 시설이라 유교 문묘와 분위기가 천양지차로 다르다. 유학자라면 당연히 항의해야 한다. 그러고도 숙종이 문제가 없다는 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관우와 현실 정치는 별개로 봤는데 특히 이 시기 북쪽에서 많이들 들어온 중국 이민자들이 재조지은이나 상국을 운운하며 차이나타운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 강제 부역이 가미된 동화정책을 실시해 정리해버렸다. 조선에서 살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는 것이 숙종의 지론이었던 것.] *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내렸는데,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顯忠)'이라는 호를 내림과 동시에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으며[*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으로 처음 보네. ㅡ <현충사 제문>. 여담으로 숙종의 증손자인 [[정조(조선)|정조]] 또한 이순신 빠돌이로서 이순신을 아주 높이 평가하여 정1품 [[영의정]]으로 추증할 정도였다.] [[을지문덕]],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을 아울러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게 하고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렸다. 1707년(숙종 33년)의 일이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종이 재위하던 시기에 [[일지매]]가 도적질을 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말로 설치고 다닌 도적은 [[황해도]]의 [[장길산]]. [[황석영]]의 동명 [[소설]]도 있다. [[경신대기근]]에 맞먹는 을병대기근([[1695년]])도 있었다. * [[성종(조선)|성종]]과 함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 왕인데 함께 암행을 나가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멋진 [[임금]]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서울에서는 "숙종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라는 구비 설화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의 이미지는 상당히 괜찮았던 모양이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신하들이 죽든 말든 왕비가 바뀌든 말든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다. 치세가 길고 지역마다 이미지가 다를 수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 조선이 고구려보다 거대한 국가라고 믿었던 것 같다.[*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 12월 무인. “召對玉堂官 講東國通鑑 至高麗安市城事 上歎曰 高麗 一小國耳 以善守城名 能抗隋唐百萬之師 我國地方 比高麗倍之 山川險阻 古今一也 而丙子之亂 虜兵如入無人之地, 竟有下城之辱 言念及此 不覺痛心] 숙종실록 38권에는 수성에 능했던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쳤거늘 더 큰 땅을 가진 조선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다고 통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땅의 넓이가 아닌 국력의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고구려의 만주는 척박한 땅이여서 크기에 비해 별 가치가 없었고 조선은 [[백제]]+[[신라]]의 땅에 고구려의 주요 곡창 지대였던 대동강 유역까지 차지한 국가였다. 고구려의 권역을 정확히 알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만주의 가치를 낮게 생각하면 고구려의 최대 권역은 [[만주]]+[[대동강]]+[[한강]] 유역 정도인데, 숙종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만주가 추운 지역이다보니 [[벼]]가 자라기에 부적합한 것이지 엄연히 만주는 큰 [[강]]이 여기저기 흐르고 땅도 비옥하고 여름이면 적절히 [[비]]도 오고해서 지금도 옥수수, 대두, 밀, 보리와 같은 밭농사를 짓기에는 최적의 지역이다. 다량의 고품질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고 풍부한 산림 지대가 이어지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보다 더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박시백]]은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체적으로 역량은 인정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비판의 강도가 높은 식. 군강신약을 이루었다는 점과 민생, 군역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환국'에 일관성이 없고 기준도 모호하였기에 정권 교체를 통한 개혁에 쓰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 교체와 그 뒷수습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가 하면, 정치 세력과 명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 논리에 빠지는 등. 심지어 모 상소는 '권력을 잡게 한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 하시다가, 배척할 적엔 연못에 밀어버리듯 하십니다'라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왕 아래에서 신하들은 그저 몸을 수그린 채 눈치만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행여나 눈 밖에 나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을 버렸으며[* 특히 [[인현왕후]]의 폐위는 정말 생억지에 가까울정도로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남인들까지 반대했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인성 문제로 후대에 까이고 후궁을 더 예뻐한 선조도 정실인 [[의인왕후]]가 40이 넘어도 자식을 못낳는데도 내치지 않았으며, 인조도 후비인 [[장렬왕후]]를 홀대할지언정 내쫓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신하된 당연한 도리로 반대한 사람들을 자신의 말에 거역한다는 이유로 싸그리 귀양or사형과 고문을 일삼았으니 바른 말을 해야할 신하는 숙종 대에 남을래야 남을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목하에 외척이란 이유로 자기 처가와 사돈인 심온을 무고하게 죽인 태종도 바른 말 하는 신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역할을 하는 대간의 역할을 위축시키려는 대신들의 제안을 거절했을 정도.] 생존을 위해 상대 붕당들에겐 더욱 가혹해져 허울뿐인 화합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 시기 신하들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는데, 왕의 의도에 부화뇌동해 상대당파 제거에만 바빠 환국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 * 또 하나는 그렇게 거듭된 환국과 숙청으로 근래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면서도 한게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에 다가서면 발을 빼기 일쑤였고(양반층 군포 징수에 일관되게 반대), 기득권층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에도 인색하였다[* 폐단이 더할나위 없이 크던 왕족의 토지 사유 등을 방치]는 주장이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엔 그냥 저자의 조사가 부족해서 오류낸 거다.''' 숙종 대에는 궁방으로 하여금 해당 땅 주인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절수지를 획득하도록 한 금가 매토제와 절수지의 총량을 제한하는 을해정식이 제정, 시행되어 궁방전의 확대를 제한했다.[* 을해정식으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땅을 무한정 늘리는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시행되어, 궁방은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궁방전의 확대와 이후 궁방재정 통제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다만 을해정식은 지금까지 절수된 궁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정확히는 을해정식 7년전 무진정식 이후)부터 절수될 궁방에 대한 것이기에 저자가 이부분을 설령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저자의 비판이 유효한 부분은 있다. 즉, 앞으로는 특권을 내려놓겠다면서 이제까지의 특권은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적인 면세지 감축 규모도 을해년 무진년 사이에 칠년동안 절수된 삼천결에 불과했고 개혁의 성과가 이처럼 초라하다는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다.] 양역변통이 사대부의 눈치보다 지지부진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틀렸다. 오히려 양영변통절목같은 절목들이 마련되어 영조 대 균역법의 기틀을 닦았다.[* 여말 선초와 같은 대격변기가 아닌 이상, 특히 조선 시대와 같은 보수적 유교 사회에서 세법같이 민감한 주제의 개혁은 임금 하나가 마음먹는다고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까지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까지 100년 동안 엄청난 수의 논의와 다양한 중간 조치들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자. [[영조]] 시절 [[균역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도 숙종 시대의 여러 조치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명안공주를 매우 아꼈다. 숙종의 자매로는 누나인 [[명선공주]], 명안공주보다 언니였던 첫째 여동생 [[명혜공주]]도 있었지만 숙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사망하였다. 두 공주는 같은 해 4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확한 사인은 전해지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궁궐에 돌림병이 들어와 왕가가 거처하는 궁을 옮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공주들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듯 하다. 이듬해에 아버지 현종도 승하하였으니 어린 숙종에게는 어머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명안공주는 보통 존재가 아니다. 승하한 현종을 대신해서 혼인을 성대히 주관한 사람도 숙종이고 사신을 통해 수려한 수입산 비단이 오면 바로 명안공주에게 선물하였다. 숙종의 명안공주 사랑에 큰 피해를 입은 자가 [[도화서]]인데 명안공주에게 중부 견평방의 땅을 주는데 하필이면 그 땅에 도화서 청사가 있었다. 결국 도화서는 태평방에 청사를 잡기까지 다른 관청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문제는 10년에 1번은 어진을 그리는 제도를 숙종이 만들었고 당대 유행하던 초상화로 인해 도화서의 일이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명안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였고 결국 2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숙종을 괴롭게 한다.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은 아직 염습도 마치지 않아 문상객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명안공주의 집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통곡하였고 너무 슬퍼서 식사도 거르겠다고 말하여 신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세종도 백부인 정종이 승하하여 장례를 치를 때 지나치게 소식한 나머지 신하들이 걱정할 정도였고 좋아하던 고기도 먹지 않아 애간장을 태웠다. 이후 어머니였던 [[원경왕후]]가 사망하여 상중이던 세종에게 아버지인 태종은 세종에게 고기를 허락했고 심지어 자신의 사후에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세종은 고기를 먹게 하라고 미리 지시한다. 이런 태종의 조치는 후대에 모범이 되어 상중이라도 허약해질 정도로 하지 말자는 인식이 자리잡는다.] 자신보다 먼저 사망한 명안공주에게 못해준 걸 매제에게 해주고 싶었는지 숙종은 홀로 남겨진 매제인 오태주를 곁에 두고 매우 아꼈다.[* 오태주는 글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고 스스로도 시를 즐기던 숙종은 오태주와 시를 주고받았다. 이 시기 왕실의 문서에도 숙종이 오태주를 통해서 지은 문서가 많다. 그런데 오태주의 아버지이자 명안공주의 시아버지인 오두인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지독한 국문을 받았는데 결국 국문 후유증으로 유배 중에 사망하였다.] 오태주가 49세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오태주를 애도하였다. 명안공주 부부의 묘지에 가면 제문비에 새겨진 숙종의 글이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605346&cid=51885&categoryId=53463|남아있는데]] 여동생 부부를 잃은 숙종의 절망감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 조선에서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길고 다혈질인데다 강력한 왕권을 휘루든 면모 덕분에 놓치기 쉽지만 허약한 몸에 병치레가 잦아서 몸에 좋은 약재를 즐겨먹었다. * 중종 이후로 150년만에 개성을 방문해서 경덕궁과 만월대를 둘러보고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도 개성을 방문하며 숙종의 발자취를 보고 감회에 젖었다. > 使人長智莫如學 /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 > 若玉求文必待琢 /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 經書奧旨于誰問 /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 師傅宜親不厭數 /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 > 1715년 11월 4일, 6남 연령군 이훤에게 내린 어필(한시).[*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사람이 지혜를 기르려면 배워야 한다. 좋은 글솜씨를 갖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스승님을 자주 찾아뵈어 여쭤봐라."] * 자식들을 지극히 아꼈다. 특히 숙종은 8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모두 요절하고 살아남은 자식이 경종과 영조 2명밖에 없었기에 아들들을 아꼈다. 여섯 아들 중 겨우 살아서 성인이 된 세 아들 가운데 6남인 [[연령군]] 이훤을 가장 총애했다. 연령군이 5세 때 모친인 [[명빈 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숙종은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어느 아들들보다 연령군을 아껴서 원래 7세에 봉군(封君)하는 예법을 무시하고 5살 때 봉군되었고 7세의 나이에는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까지 내렸다. 게다가 1708년 연령군이 혼인 후 출가할 땐 직접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 구입에 수만냥을 들이려고 했다. 이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년전 연잉군의 제택을 마련한 돈이 수천냥이라 지적하며 반대하자 숙종은 할 수 없이 [[선조(조선)|선조]]의 적녀(嫡女)인 [[정명공주]]의 제택을 구입하여 하사하는데 그것도 연잉군이 구입하려 하는 것을 금한 것이었다.[* 근데 실록에는 연잉군의 가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연잉군에게도 들인 비용이 많았다는 당시의 견해가 있었다.] 더구나 이후 제택을 복구하는데 들인 비용도 중인 4가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고 한다. 이후 연령군이 21세의 이른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숙종은 오열을 하며 친히 제택으로 찾아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가히 아들 영조의 딸 사랑에 견줄만 했다. [[경종(조선)|경종]]의 경우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숙종이 심하게 꾸짖는 경우가 많았으며 영조에 대해서는 공부 잘한다 이런 칭찬이 아니라 몸 튼튼해서 오래 살겠구나 하는 칭찬이 잦았다.[* 실제로도 조선 왕들 중에서는 제일 오래 살았으니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극진한 애정은 연령군에게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뒤에 바로 2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료들 앞에서도 매우 기뻐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이 100일을 갓 넘기고 죽었을 때에는 "내가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라며 역시 신료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모후인 [[명성왕후]]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희로애락이 극단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행적이 영국의 [[헨리 8세]]와 유사하다. 숙종이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선택했다 내쳤다 했다면 헨리 8세는 아내를 6번이나 들였으며 그중 2명은 죽이고 2명은 내친 왕으로 그 와중에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나 짓밟았으며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라는 점도 닮았지만 사적으로도 숙종이나 헨리 8세나 성질이 개 같은 왕이었기에 당시 신하들 입장에서는 대하기 힘든 왕이었고 특히 헨리 8세는 말년에 이르면 그 성질이 더 나빠져서 궁중의 신하들은 왕이 빨리 죽어주기만을 바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좀 다른데 숙종이 백성을 돌보는 야사가 있듯 헨리 8세도 '해리 왕' 이라는 애칭이 있으며 당시에도 나쁜 평을 받은건 아니지만 현재에도 평가는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