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조선 왕조 역대 최강의 왕권 === 숙종의 아버지 [[현종(조선)|현종]]은 [[효종(조선)|효종]]의 [[고명아들|외아들]]이었고, 숙종 본인은 현종과 정실 부인인 [[명성왕후]] 소생의 [[고명아들]]이었다.[* 누나와 여동생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막내여동생인 [[명안공주]] 1명만 남았으나 명안공주도 가례를 올리고 성년을 넘기자마자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이것만으로도 [[정통성]]으로 꿀릴 것이 없는데,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외척]]과 관련된 트러블도 전혀 없었던 덕분에 부계와 모계 모두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이었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던 왕으로 6대 왕이었던 [[단종(조선)|단종]]이 있다. 단종은 '''적자, 적손, 장자, 장손'''에 '''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통성을 가진 [[혈통]] 끝판왕이었다. 단종의 혈통은 [[세계사]]를 모두 둘러봐도 꿀리지 않는 정통성으로 유명하다.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계유정난이 당대에도 명분이 부족한 반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단종의 완벽한 정통성 때문이었다.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초명은 '광(爌)'이었으나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李廣)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양제(수)|수양제]]의 이름인 '양광(楊廣)'과도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양광처럼 개 같긴 했다.~~ 물론 전한 장군 이광 및 수양제와 숙종의 이름 [[한자]]는 다르지만, [[한국 한자음]]이 같기에 바꾸자고 한 것 뿐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간행된 [[https://jsg.aks.ac.kr/dir/view?dataId=ARC_kh2_je_a_hsu_20356_000|《열성어휘》]]에 음이 '돈'으로 적혀 있고 대응하는 음의 한자로 '暾(아침해 돈)'을 써두었기 때문에 '순'이 아닌 '돈'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1670년 작성된 숙종의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rd&gubun=des&dataId=G002+JSG+KSM-XB.1666.0000-20211101.RD00492|작명 단자]]에는 음이 '純(순수할 순)'으로 적혀있고 뜻풀이 글자로 '明(밝을 명)'을 써두었다.[* '焞'의 뜻은 '돈'으로 읽을 때에는 '귀갑 지지는 불'이고 '순'으로 읽을 때에는 '밝다'이다. 그러니까 뜻풀이를 통해서도 저 글자는 '순'으로 읽는게 맞다고 명시한 것이다. 이름자의 뜻이 '귀갑 지지는 불'(...)일리도 없고...] 전자는 당사자인 숙종 사후 170여 년 뒤에 작성된 것이고 후자는 숙종 생전에 작성된 것임을 고려하면 '돈'보다는 '순'으로 발음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독자였기에 [[연산군]] 때의 [[중종(조선)|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마땅한 대군도 없었고, [[남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경계대상이었던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삼복의 옥]]으로 제거되어 [[동평군]] 정도만 남게 된다.[* [[소현세자]]의 자손들도 있으나, 귀양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 종친으로서의 위계와 영향력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철종(조선)|철종]]을 마지막으로 [[효종(조선)|효종]]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에는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이 17촌, 18촌 이상 차이나는데도 효종계 직계 혈통에 각각 [[은신군|양]][[효명세자|자]]로 입적되어 차례대로 즉위했다.] 이 때문에 친어머니인 [[명성왕후]]와[* [[명성왕후]]도 숙종과 똑같이 한 성깔 하는 왕비였다. '''숙종 이후 모든 왕들이 까칠하거나 성격이 난폭했던 원인을 따지고 보면 [[명성왕후]]의 핏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법적 증조모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숙종을 거의 견제하지 못했다.[* 명성왕후와 장렬왕후 역시 숙종을 통제하기는 다소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둘 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써 숙종을 분명히 견제할 수 있고 그럴 명분도 많았다. 실제로 숙종은 그들 살아 생전에는 대비들의 친정이 속해있기도 했던 서인들을 함부로 숙청할 수 없었고, 해도 사약 같은 극형을 내리지 못했다. [[내명부]] 문제였던 [[인현왕후]]와 [[장희빈]] 문제는 말이 필요없다. 그러다가 1683년에 대비 명성왕후가, 1688년에 장렬왕후가 사망하면서 숙종을 견제할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고, 결국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만에 국상중인데도 숙종은 참혹한 환국으로 손꼽히는 [[기사환국]]을 일으키며 남인까지 폐위를 반대한 인현왕후를 억지로 쫓아내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게 된다.]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바로 [[친정]](親政)에 나섰다.'''[* 근데 숙종이 설령 3~6살 정도에 즉위했더라도 친어머니 [[명성왕후]]와 친할머니 [[인선왕후]], 법적 증조할머니 [[장렬왕후]]가 있었고 숙종의 정통성을 위협할만한 종친도 인조의 숙청을 비롯한 각종 사건에 휘말려 죽고 없었고, 그나마 위협이 될만한 인평대군의 자식들도 경신환국으로 죽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왕권이 형성되었다. 비슷하게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단종의 경우 친모가 산욕열로 사망한 상태였고(문종이 부인을 더 들였다면 든든한 뒷배가 되었겠지만 단종을 낳고 나서 문종이 부인을 새로 들이지 않았다. 또 단종을 일찍 결혼시키지 않아 단종의 든든한 처가를 구성하지 않았다.), 친할머니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세종 역시도 계비를 들이지 않은데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기세등등한 종친이 있는 상황이었다.]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으로 [[조선/왕사|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 대표적으로 [[문종(조선)|문종]], [[단종(조선)|단종]], [[덕종(조선)|의경세자]], [[인종(조선)|인종]], [[소현세자]] 등등]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큰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험악한 성깔은 어머니([[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 [[현종(조선)|현종]]의 아들이라곤 숙종 혼자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명성왕후|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차근차근 하나 둘씩 밟았다. 추가로 계증조모 [[장렬왕후|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세조(조선)|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반정|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가능성 자체가 없다. [[예종(조선)|예종]]이 계승권이 높은 가까운 촌수의 왕실 종친들을 관직에 아예 못 나가도록 법으로 철저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 법으로 인해 조선의 왕족들은 경험, 야망, 인맥 등을 가질 모든 기회를 상실했고 이때문인지 예종 이후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역모에 억지로 추대된 거라면 몰라도 [[태종(조선)|태종]]이나 [[세조(조선)|세조]]처럼 왕족이 직접 주도한 [[쿠데타]]는 [[인조반정]] 뿐이었다. [[단종(조선)|단종]] 같은 상황이 다시 오고 막장 숙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물론 왕대비인 명성왕후가 홍수의 변 같은 물의까지 일으키면서 인평대군의 자식들을 견제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종친은 관직을 못나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족이기 때문에 위협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결국 경신환국으로 인평대군의 자식들인 삼복이 사실상 종친이라는 이유로 숙청이 되었으므로 종친은 여전히 경계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왕실어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종친들이 처신을 잘못할때의 결과인 셈이다.] [[문종(조선)|문종]]과 [[인종(조선)|인종]]과 [[헌종(조선)|헌종]][* 다만 헌종은 워낙 어린 나이(고작 8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명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은 짧지 않다. [[세도정치]] 때문에 제대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그렇지. 반대로 문종은 재위 기간은 짧은데 아버지 세종의 말년부터 [[대리청정]]으로 실권을 쥐어서 실제 통치 기간은 그리 짧진 않다.]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조선)|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종(조선)|문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양녕대군]]으로, 문종은 왕의 삼남의 적장자로 태어난 것 뿐이다.]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조선)|단종]][* 원손 - 세손 - 세자 - 왕 - 상왕을 모두 거친데다 정통성도 완벽한 유일한 왕이다.]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조선)|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효장세자]]나 [[사도세자]]나 둘 다 [[영조]]의 [[서자]]다. [[영조]]의 적자가 없어서 문제가 안 됐을 뿐이다.]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조선)|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조선)|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조선)|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조선)|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조선)|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경술국치|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완벽한 그는 왕권을 눈치보지 않은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조선)|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완벽한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