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환국(조선)|환국]](換局) 정치 ===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모든 권력이 독점(일당독재화)'''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는 식으로 계속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평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인조]]의 3남)이 서인 세력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 본래 [[숭선군]]은 서인 집안(인목대비의 친정조카와 결혼했다.)과도 혼례를 맺었지만 [[김자점]] 일파와의 친분으로 인해서 서인들에게 탄핵을 받자 남인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였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 김좌명은 1671년에 별세한다.]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둘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 다만 조사석은 서인이었지만 [[장희빈]]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애초에 육촌누나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부터가 중전인 [[인현왕후]]보다 [[장희빈]]을 예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이 지난 [[기사환국]] 이후 [[장희빈]]에게 [[토사구팽]] 당하면서 귀양을 가게 된다.]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 명안공주의 남편]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도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일단 종친인 삼복이 몰락하는 [[경신환국]]이 일어나면서 이 대리전 자체는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척 서인들의 승리는 이들 세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면서 숙종을 어느정도 제어할수 있는 왕실어른인 대비 [[명성왕후]]와 대왕대비 [[장렬왕후]] 덕분이었는데, [[명성왕후]]가 [[1683년]]에 일찍 죽고, [[1688년]]에는 [[장렬왕후]]까지 사망하면서 숙종 입장에선 골치아팠던 외척 서인들의 이용가치가 매우 떨어진데다 세력은 이미 커진 이들을 더 이상 놔둘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를 뒷받침하듯 숙종은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 뒤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들까지 숙청하면서 최종적으로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면서 남인이 다시 승리했다. 게다가 조사석마저 [[기사환국]]이 일어난 이후 [[1690년]] 즈음에 귀양을 가면서 서인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는 듯 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은 다시 부활했고 최종 승리는 서인의 독차지가 되었다.] 즉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조선)|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기축옥사]]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했다.[* 다만 이 때는 피바람이 한 번 뿐이었지만 숙종 때는 피바람이 숙종 자기자신의 변화된 입장따라 계속 몰아쳤다. 게다가 [[선조(조선)|선조]] 때는 [[정여립]]의 옥사로 [[동인(조선)|동인]]들이 많이 숙청되었어도 동인은 야당으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균형과 견제가 나름대로 이루어졌지만, 숙종 때 '''[[환국(조선)|환국]]''' 이후로는 야당이 별로 힘을 못 썼다. 게다가 [[선조(조선)|선조]] 때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한 지 2년 만에 다시 [[동인(조선)|동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서인은 정권만 내놨지, 보복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 때 환국이 일어날 때는 보복성 숙청이 많이 일어났다. 보복성 숙청의 시작은 다름 아닌 [[기사환국]]이었다. 심지어 선조 이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때도 사화로 피바람이 불었지만 사림파는 야당으로서 나름 힘을 썼는데 숙종 때는 환국으로 인해 정권이 바뀌면 야당이 힘을 못 쓴 것이다.]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준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재위 1년([[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 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 사실 현종 15년([[1674년]]) [[갑인환국]] 이후 남인이 집권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이 때까지는 좀 붕당 간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피바람도 없었다.] * 재위 6년([[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 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내고 서인 우위로 다시 뒤집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 크리.[* 그래도 [[기사환국]] 이전까지는 약간이나마 붕당의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졌고, 서인과 남인이 원수지간으로 변했을지라도, 상종의 여지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왕실의 어른인 [[명성왕후]]가 대비로 있고 왕실의 최고어른인 [[장렬왕후]]가 대왕대비로 살아있었던 것도 약간이나마 붕당의 균형과 견제가 이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 재위 15년([[1689년]]), (재위 16년차)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많이들 오해하는데 왕비 교체는 남인도 당연 반대했다. 그 명분이 너무 억지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이때를 기점으로 서인과 남인은 그냥 원수지간 정도를 넘어서서 서로 피튀기는 싸움을 하는 사이로 변질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격화되었다.[* 그래도 재집권 초만 해도 남인들 역시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등 서인과 상종의 여지는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듯 했지만, 서인의 거물급에 속했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사를 당한 데 이어서 온건파였던 오두인, 박태보가 폐비 반대 상소를 올리다가 곤장을 심하게 맞고 귀양가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역시 온건파였던 이상진도 귀양에 처해진데 이어서 조사석도 귀양에 처해지고 민암 일파와 [[장희재]]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사이는 더더욱 나빠졌다. 심지어 이 때는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도 한참 되었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장렬왕후]]마저도 세상을 떠난 것도 당쟁이 사생결단으로 격화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재위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이후 남인은 다시는 제1당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크게 보면 동인에 대한 서인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 재위 27년([[1701년]]), [[갑술환국#s-4|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모두 박살냈으며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곧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으로 남인은 몰락을 넘어서서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했다.[* 신사의 옥으로 인해서 당쟁은 사생결단 식으로 더욱 격화되었는데 그래도 [[신임옥사|신사의 옥]] 이전까지는 겉으로나마 유지되던 붕당의 균형이었지만, 신사의 옥 이후로는 붕당 균형이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른다.]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을 기점으로 노론은 완전히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를 모두 완벽하게 장악했고, 이미 육조의 판서 자리도 완벽히 장악했다. 이미 무고의 옥 이전인 재위 22년인 [[1696년]]부터 노론이 정승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 사건으로 좌의정과 우의정은 노론 세력에 완벽히 넘어간다.] * 재위 31~32년([[1705년]] ~ [[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정치에서 싸그리 소멸시켜버렸으며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 역시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제1세력을 넘어 1당 독재 수준으로 굳어진다. *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 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 다만 병신처분 이전까지는 소론도 같이 등용했다.]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조선)|환국 정치]](換局政治)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더욱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했다.[* 해외파 중에서는 관우였고 조선의 인물 중 충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사육신]]이다. [[남효온]]의 육신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선비들 사이에 사육신과 단종 복권론이 있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 강조한 이가 숙종이다. 이후로 사육신의 사적을 복원하는 사업도 착착 진행된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사육신의 시조는 모두 원래 원작자 미상으로 전해오던 것을 숙종 ~ 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사육신의 것으로 '비정'된 것이다.]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조선)|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조선)|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 '신임사화'라고도 하나, '사화'란 사림이 화를 당한다는 의미이므로, 사림 대 훈구 구도가 종식되고 사화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다. 숙종이 잦은 [[환국(조선)|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너죽고 나죽자 하는 피비린내 싸움]]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서인→노론)의 일당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겨우겨우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균역법]]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儉弱, 검소하고 절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후대에 당쟁이 가장 격화된 시기를 숙종의 시기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다.]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6/read?bbsId=G005&itemId=63&articleId=20296204|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 >---- >[[숙종실록]] 숙종 17년([[1691년]]) [[윤달|윤]][[7월 11일]] 갑자 1번째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