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철천지 악연 === 이렇게 숙종은 피튀기는 환국을 일으킨 끝에, 세자 시절부터 미워했던 서인의 영수, 그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숙종의 증조부 [[인조]], 조부 [[효종(조선)|효종]], 부친 [[현종(조선)|현종]]까지 내리 3명의 선대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 없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약발이 돌지 않고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숙종의 [[송시열]] 사사는 철저한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조선)|경종]]을 원자로 삼고, 더 나아가 세자로 삼는 것(세자 건저)을 송시열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 [[송시열]] 曰 : "[[인현왕후|중전]]의 춘추(나이)가 아직 미령(微齡, 어리신데)하신데, [[경종(조선)|후사]](後嗣)를 들이시나이까"라는 간언으로 나아가 여차하면 머리 풀고 도끼 반대상소라도 할 작정으로 누구보다 격렬히 반대했었다.]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다고 추측된다. 숙종은 애초부터 [[송시열]]을 싫어했던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답게 경종의 원자책봉을 밀어붙였고, 송시열 역시 하던 버릇대로 원자책봉을 열렬히 반대하며 숙종과 각을 세우다[*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으려했을 정도로 날뛰었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이로 인해 [[송시열]]을 따르던 서인계 유생들과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마저 죄다 유배를 보내는 불같은 성질을 보여줬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이 난 숙종은 [[송시열]]을 국문(고문)하기 위해 그를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직접 불러들였다. 그때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올라오는 길에[* 당시에 [[고문|국문]]이란 문자 그대로 고문 받고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당시 80세가 넘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으니 그야말로 고문받다 죽는 것은 자명한 일.] 그를 따르는 노론 추종자들이 몇백 명이었다고 하며,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송시열을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든 선전관을 출동시켜서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켜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조선)|효종]]을 둘째 아들[* 둘째아들 - 仁祖之次子.]이라 못을 박고[* 이렇게 대놓고 못을 박아버리면 [[효종(조선)|효종]]은 정통성에 있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차기 왕 [[현종(조선)|현종]]과 그 아들 숙종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 부인인 [[인선왕후]]에 대해서도 대공복 주장을 폈다.[* [[민회빈 강씨|강빈]] 신원을 현종조에 주장하기도 했지만, [[민회빈 강씨|소현세자빈]]을 신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숙종이었기에 이는 관련이 없다.]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사|숙종의 정통성]]([[역린]])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정치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경종(조선)|세자]]의 [[조선/왕사|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조선)|경종]]의 [[조선/왕사|정통성]]을 크게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조선)|경종]]을 [[조선/왕사|왕]]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역사의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조선)|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 원래 [[유교]] 사상으로 볼 때 상중에는 부인과 [[성관계|동침]]도 안 해야 한다. [[성리학|예학]]이 교조화된 조선 후반기엔 시부(시아버지) 상중에 임신한 부인이 자살하는 일까지 나온다.]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숙종 이순) 축하를 대놓고 디스했다고 한다.[* 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귀향]]해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정치적 연륜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서인의 영수이자 원로인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바로 숙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