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종(조선) (문단 편집) === 추증과 복권 ===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 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현대의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과도 닮아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조선총독부 철거]] 문서 참고. 다만 세부적으로 보면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보다는 [[노무현 정부]] 이후에 추진한 진실화해위의 과거사 정리와 어느 정도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조선)|정종]](定宗)과 [[단종(조선)|단종]](端宗)을 왕으로 [[종묘]]에 신원을 회복(신주를 가져다가 모시는 일)시킨 후 깨끗이 복권시켰다. [[정종(조선)|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에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시호 또한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이유는 [[세조(조선)|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조선)|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물론 이때도 단종을 폐위, 사사한 실제 책임자가 세조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았지만 명분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이건 굉장히 대단한 일인데 [[단종(조선)|단종]]과 크나큰 악연이 있는 [[세조(조선)|세조]]는 숙종 본인의 10대조 직계 조상이기 때문. 세조 이후의 조선 국왕들은 누가 뭐라 해도 모두 '''세조의 직계 후손들이다.'''(항렬상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덕종-인조-효종-현종-숙종)세조의 아들 ~ 증손자뻘까지는 단종을 추모하는 건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므로 국왕들이 과민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사화도 일어났는데, 수백년 대통이 이어져내려온 이상 이제 조상인 [[세조(조선)|세조]]의 [[계유정난|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정통성에 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왕의 권위가 크게 단단해졌기에 가능해진 것.] >[[세조(조선)|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間爭)하여, [[세조(조선)|세조대왕]]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1702년]]) 5월 14일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조선)|단종]] 복위 때는 그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친히 특별히 열었다. [[태종(조선)|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 '사실상'인 이유는 [[회안대군]]과 그의 가족들은 한순간 직계 종친의 권세를 잃고 귀양 가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 대신 [[박포]]가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처형돼 오랫동안 [[2차 왕자의 난]]이 박포의 난으로 불렸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안대군의 아들 [[의령군(1385)|이맹종]]은 위험 분자로 인식돼 결국 [[세종(조선)|세종]] 때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게 된다.]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인조 때 그나마 군역과 세금을 면제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복권된 건 아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했던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무안대군|이방번]]과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도 복권시켜서, 이때부터 이들은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라는 정식 [[시호]](왕자)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 이 [[민회빈 강씨]] 사례 또한 위의 단종 사례만큼이나 대단한 건데, 그 누구보다 [[민회빈 강씨]]의 복권에 적대적으로 나온 사람이 바로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조선)|효종]]이었기 때문.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챙겨줬을지언정, 형수인 [[민회빈 강씨]]만큼은 '''역강(逆姜)'''이라 표현할 정도로 자기 정통성에 있어 극도로 민감해서 그녀의 복권을 주장한 신하들을 처벌할 정도로 절대 신원시켜주지 않았다.]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 그런 목적으로 단종의 [[사육신|충신]]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사실 사육신은 야사 논외로 치고 보면 정말 (조선 왕들이 좋아할 만한) 충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육신이나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등은 그렇다 쳐도 일개 무당까지 복권해서 위패를 배식단에 올려주는 후대 왕들의 행적을 보면 그 목적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역시 정통성에서 문제가 적었던 현종은 이러한 사안에서 무신경했는데 이는 아들인 숙종의 입지가 매우 탄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숙종은 정실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후계자인 [[경종(조선)|경종]]은 사친 [[장희빈]]이 사사당한 약점, 경종 이후 왕이 되는 영조는 사친이 한미한 무수리로 죽은 남편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짓 소문(영조는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이기에 숙종의 자식인 점은 확실하다.)이 떠도는 등 후계자가 되는 두 왕자 모두 [[조선/왕사|정통성]]에 크나큰 결함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 특히 [[단종(조선)|단종]]과 그 [[사육신|충신들]]의 복권은 후계를 생각한 작업이라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선조 때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4대 사화에서 피해를 입은 사림파 인사들이 복권되기는 했지만 이 때 당시만 해도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및 [[사육신]]은 복권이 되지 못했고 심지어 [[단종(조선)|단종]]도 아직 일개 왕자로 불리는 노산군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그 이후로 [[광해군]], [[인조]] 등을 거치면서 조금씩 복권 여론이 생기기 시작해서 [[효종(조선)|효종]] 때 단종 복권 논의와 [[현종(조선)|현종]] 때 신덕왕후가 일단 복위되면서 복권 여론이 공론화 되기 시작하더니 숙종 때 본격적으로 과거사 정리가 추진되었다.]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조선/왕사|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크게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왕권이 강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반대 의견을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의 왕권쯤은 있어야 복권도 할테니까 물론 설사 왕권이 허약했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있다면 복권쯤은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영조]] 때는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이 복권되었고 [[중종(조선)|중종]]의 왕비였지만 즉위 이후 7일만에 폐위되었던 [[신수근]]의 딸이 [[단경왕후]]로 복권되었으며 [[정조(조선)|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순조]] 때에는 [[남이]]도 복권되었으며 [[철종(조선)|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는 [[정도전]]을 [[역성혁명|건국]]에 공이 있다고 완전히 복권시켰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하면서, 처음 [[경복궁]] 등 [[한양도성]]을 기획하고 궁궐 내 각종 전각의 이름을 붙인 [[정도전]]의 업적을 인정해 그를 신원 복권시켰다.]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107011_004|복권되었고]][* 인조 6년에 반정을 계획했다가 잡혔는데 놀랍게도 광해군과도 접촉하였으며 광해군의 친필 편지도 있었다. 때문일까, 광해군은 사건의 실패를 접하자 한동안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순종(대한제국)|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의 대부분과, 심저어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이징옥]]조차 복권된다.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어차피 순종 조에는 이미 일본의 속국 신세(일단 고종이 강제 퇴위에 반발하는 중에 순종의 즉위가 권정례로 치러진 상황)라, 망하기 전에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이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