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휘공주 (문단 편집) === 논란 === 이때에 나라 살림이 썩 좋은 형편도 아니었지만, 왕실에서는 여러 공주들을 위해 재화를 아끼지 않았다. 효종 대에 공주가 나가서 살 집을 크게 지으니, 시할아버지 정유성이 집을 크게 짓지 말기를 간청하여 효종이 70여 간으로 줄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국법에 명시된 것보다 크게 지었다. 현종은 여동생 숙휘공주를 위해 군사 500명을 투입해서 집 수리를 시켰는데, 무더위에 군대를 동원해 일을 시키는게 말이 되냐는 비판을 받자 "이렇게 일할 곳이 많은데 5백명을 이틀만 일 시키는 것도 내가 생각해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5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05024_001|#]] ] 또 흉년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죽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올라오는 와중에, 숙휘공주의 집을 짓겠다고 큰 공사를 벌여서 비판 받았다. 또한 [[평안남도]] [[용강군|용강현]]에 적통지라고 하는 둑이 있었는데, 이 둑은 백성의 논 수천 두락에 물을 댈 수 있었다. 공주가 이 둑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만드려고 하는 바람에 놀란 관찰사가 "백성들 위해 둑이 있으니 못하게 하라"고 왕에게 아뢴 일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