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국7사묘 (문단 편집) == 배경 == 이 묘가 어떻게 생겨났는 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원래 A급 전범들은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1948년 12월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화장 후 유골은 비행기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뿌려졌다.[[https://www.bbc.com/news/world-asia-57474104|#]] 하지만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가 화장했던 [[화장장]]에서 그나마 수거하고 남은 한 항아리 분량의 유골 조각과 재를 수습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수거하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에서 시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던 데다 [[미군]]이 태평양에 뿌리려고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거하고 남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한 항아리만큼이나 모였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화장 과정에서부터 작심하고 빼돌린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줬거나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고 묘를 조성했다면 그렇게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즈오카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인 [[https://ja.wikipedia.org/wiki/%E8%88%88%E4%BA%9C%E8%A6%B3%E9%9F%B3|코아칸논]](興亜観音)상 [* 흥아관음. 흥아는 직역하면 '아시아를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실제로는 [[대동아공영권]]을 가리키는 단어다. 대동아공영권이 어떤 사상인가를 생각하면 관음상에 저런 이름을 붙인 의도부터가 매우 불순하며 마쓰이가 생전에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추모하려고 세웠다.] 밑에 10년 간 숨겨 두었다. 이것까지도 당대의 분위기를 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8년에 그 유골을 다시 꺼낸 다음 이들이 조성한 게 바로 순국7사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