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수이성비판 (문단 편집) ==== (제1편) 개념의 분석론 ==== 순수이성비판은 사실 목차와 차례가 대단히 지저분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위에서 서술한 바, 칸트가 10년 이상이 걸린 연구의 기록들을 1년에 걸쳐서 한꺼번에 서술한 관계로 발생하였다. 그리고 복잡한 차례와 목차의 문제로 인해서, 칸트 연구자들이 가지는 첫번째 과제가 해당 절목의 주요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문제는 칸트가 초판과 재판을 다른 절목의 내용으로 중복 기입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선험적 분석론의 가장 큰 절목이 되는 개념의 분석론과 원칙의 분석론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되, 개념의 분석론을 재판의 순번을 먼저 따르며,[* 선험적 감성론에서 하위 절목인 공간론과 시간론에 2~8까지의 하위 절목이 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9~27의 연속되는 하위 절목이 선험적 분석론에 기입되어 있다. 이는 칸트가 해당 내용들을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기록할 의도를 지녔음을 나타낸다.] 초판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근거는 별개의 하위절에서 설명한다. 개념의 분석론 부분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심각한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인데, 칸트가 아무런 예비 설명 없이 느닷없이 오성의 기능을 범주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분석론은 우리의 선천적 전 인식을 순수한 지성(오성)의 인식 요소들로 분해하는 데에 존립한다. 이 무렵에 다음의 네 가지 점이 중대하다.1. 개념은 순수한 개념이요,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 2. 개념은 직관과 감성에 속하지 않고, 사고와 오성에 속한다는 것. -중략- 4. 개념에 관한 우리의 표(表)[* 이는 범주표를 의미한다]는 완전하고, 순수한 오성의 전범위와 완전히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재희 번역, 2002, 박영사, B89 제1문 선험적 분석론 순수이성비판을 큰 틀에서 보자면, 현상을 우리 마음에서 직관적으로 규정하며 성립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원리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다루었다. 즉, '감성'과 '직관'은 다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부분은 사고가 남아있다. 이 사고를 관장하는 인간의 정신기능을 가리켜 '지성'[* (독일어Verstand 영어Understanding, 최재희 역의 본서에서는 '오성悟性'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어색한 일본식 번역어인 오성은 현재 국내 철학계에서는 사용을 자재하고 있다.)]이라 칭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판단'과 '범주'라는 것이 문두에서 등장하며 지성을 설명하니, 범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매우 당혹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범주에 대한 정의는 칸트는 뜬금없이 글 중간에 서술하는 바, 아래에 다시 서술되겠으나 미리 기술한다. >나는 미리 범주라는 말을 설명하여 두고자 한다. 범주란 대상 일반의 개념이요, 이런 개념을 통해서 대상의 직관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의 하나에 관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아진다. 정언 판단의 기능은 주어의 객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논리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두 개념 중에 어느 것에 주어의 기능을 주고, 어느 것에 객어의 기능을 주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내가 만약 물체의 개념을 실체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실체 범주에 의해서 경험에서의 물체의 경험적인 직관은 항상 주어로만 보아지고 결코 한갓 객어로 보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된다. 실체의 범주 이외의 딴 범주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8-12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여하튼, 개념의 분석론은 범주를 다루며, 감성학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증명이 두 가지였던 것과 같이, 이 범주에 대한 칸트의 증명 역시, 적극적 증명이라 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증명과, 소극적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선험적 증명 두 가지로 주어진다. 이 중 형이상학적 증명은, 지성이 수행하는 기능 일반인 "판단"이란 어떠한가에 대한 탐구로부터, 그러한 일반 논리학으로부터 사물을 사물로 인식하는 조건에 대한 연구, 곧 선험적 논리학의 내용이 무엇일지를 이끌어내는 과정으로 진행되며, 따라서 범주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논의가 형이상학적 증명에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이러한 범주가, 곧 감성을 통해 들어온 직관을, 우리의 틀에 따라 재해석하는 지성의 기능이 있어야만 "나는 생각한다" 라는 표상, 곧 순수통각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의가 범주에 대한 선험적 증명이다. 이 둘은 각각 범주의 내용, 그러니까 범주라는 것이 어떠한 사실인지에 대한 발견하는 논의와, 그와 같이 발견된 범주가 어째서 타당한지를 다루는 정당화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형이상학적 증명으로 들어가 보자면, 칸트는 이 증명을 위해서, 제일 먼저 기존의 일반논리학에서 사용되던 판단이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모든 판단에는 하나의 개념(범주 혹은 모형)이 들어 있다. 이것은 많은 표상들에 타당하고, 이런 많은 표상 중에서 대상에 직접 관계하는 표상 즉 주어진 표상(주어)도 포함된다. >-중략- >왜냐하면 하나의 직접적 표상대신이 이런 표상과 그 외의 여러 표상을 포괄하는 하나의 보다 더 높은 표상이 대상을 인식하고자 사용되고 이 때문에 많은 가능한 인식이 하나의 인식에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성의 모든 작용을 판단들로 환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오성은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고 생각될 수 있다. >-중략 >만약 우리가 '판단 일반'의 전 내용을 무시하고, 판단에 있어서의 '오성의 형식'만을 주목한다면, 판단에 있어서의 사고 기능은 각각 세다리를 포함하는 네 항목 아래 개괄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네 항목은 다음의 표로 적당히 나타내질 수 있다. >|| 1.분량 || 2.성질 || 3.관계 || 4.양상 || >|| 전칭판단 || 긍정판단 || 정언판단 || 개연판단 || >|| 특칭판단 || 부정판단 || 가언판단 || 실연판단 || >|| 단칭판단 || 무한판단 || 선언판단 || 필연판단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93-B95, 오성의 논리적 사용 일반 등에서 발췌 이 판단의 표는, 칸트가 전통적인 논리학 저서의 내용을 자신의 현재 필요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실례를 들어 보자면, "모든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좋아한다"라는 판단은 양에서는 전칭적이고, 질에서는 긍정적이고, 관계에서는 정언적이고, 양상에서는 확정적[필연적]이겠다. "장-피에르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양에서는 단칭이고, 질에서는 부정적이고, 관계에서는 정언적이고, 양상에서는 확정적[필연적]이겠다. 그리고 칸트는 선험적 논리학이란 이러한 판단을 사물의 인식 가능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니, 지성의 일반적인 판단에 대한 이 표를 수정하여 선험적 논리학의 범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인식 가능 조건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일단 사물에 대한 판단의 질료는 감관이 최초로 주는 것이었고, 그 기능을 하는 능력을 '감성'이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선험적 감성론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칸트에 따르면, 사물이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 직관의 질료들이 지성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되는 과정을 거쳐야 우리에게 비로소 사물은 사물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을 칸트는 ''''종합(Synthesis)''''라고 칭하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서두에서 언급한 선험적 종합판단이니 할 때 언급한 그 종합이 맞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종합'이라 일컬었냐면, 여기서 칸트는 경험일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종합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물 인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종합은, 지성의 활동이니, 지성의 일반적인 활동인 판단의 일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성의 일반적인 활동인 판단은, 사물 인식이라는 특정한 맥락 하에서 그 맥락에 맞게 다소 변형되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선험적 논리학에서 이러한 의미로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판단을, 바로 ''''범주''''라는 이름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다음은 칸트의 언급이다. >질료가 없어서는 오성의 순수한 개념은 아무런 내용도 없겠고, 따라서 전혀 공허한 것이겠다. 그런데, 시공은 순수한 선천적 직관의 다양을 내포하지만, 그러한 데도 우리 심성의 수용성의 조건에 귀속한다. 이 조건 아래서만 심성은 대상의 표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따라서 이 조건은 '대상의 개념'도 항상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고의 자발성은 다양에서 인식이 발생하자면, 다양이 먼저 어떤 방식에 있어서 통관되고 받아들여지며 결합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작용을 나는 ''''종합(Synthesis)''''이라고 말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2,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판단이 포함하는 각종 표상들에 통일을 주는 개념의 동일한 기능이, 직관이 포함하는 각종 표상들의 단순한 종합에도 통일을 주고 있다. 이런 통일이 보편적으로 말해서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래서 직관 일반의 대상에 선천적으로 관계하는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수효는 모든 가능한 판단의 (일반)논리적인 기능들이 상술한 표에서 보였던 그 수효만큼 생긴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순수한 개념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범주''''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도를 성취한 결과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못 떨어져 있지마는, 우리의 애초 의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와 같기에 말이다. >|| 1.분량 || 2.성질 || 3.관계 || 4.양상 || >|| 단일성 || 실재성 || 속성과 자존성 || 가능성-불가능성 || >|| 다수성 || 부정성 || 인과성과 의존성 || 현존성-비존재성 || >|| 전체성 || 제한성 || 상호성(능동과 수동) || 필연성-우연성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6,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판단의 표와 범주에 대해서 더 말하자면, 칸트는 언급했듯이 위의 범주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논하고자 했던 범주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했다. 하지만, 전술되었듯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의 범주가 불완전하다고 여겼으며, 사실 그 때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취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되어졌기 때문이다.[*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g.kakaocdn.net%2Fdn%2FcooIMX%2FbtqAhrw8wGJ%2FlzbZ2cZyrPf0aRDGgGFLI0%2Fimg.png 해당 초상화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르네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밟고 있는 그림이다. 그는 칸트보다도 128년이나 전에 태어났다. 칸트의 시대 보다 1세기나 앞서서 당대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은 비평적으로 탐구하며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다.] >이러한 기본개념들을 탐구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총명한 사람에게 적절한 기도(企圖)였으나, 그러나 원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마주치는 대로 주어모았고, 우선 열개를 손에 넣어서 범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에 또 따로 다섯 개를 발견했다고 믿었고, 이것을 후범주라는 이름 아래서 첨가하였다. 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7,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그렇다면, 여기서 칸트의 범주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사례는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진지하게 형이상학을 연구한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그외에 언급된 범주론에 관한 내용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칸트는 거기에 대한 '''고의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내가 현재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체계의 완성이 아니라, 체계에 대한 원리들을 완성하는 것뿐이다. 이렇기에 파생개념을 추가하는 일을 나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보류한다. >-중략- >이러한 파생개념에 주의하고 되도록이면 이러한 파생개념을 완전하기 기재함은 필요하고도 불쾌하지 않은 노력이 되겠으되, 이런 노력을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범주들을 정의하고 싶지마는, 이러한 정의를 나는 이 분석론에서 고의로 생략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08-109,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 중에서 발췌 다만 칸트는 자신의 범주표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세 가지 주석을 2판에서 다음과 같이 추가한다. 물론 위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칸트가 정확하에 어떠한 방식으로 일반적인 판단표가 12개라고 보는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판단표에서 어떻게 선험적 논리학의 열두 범주가 유도되는 것인지의 과정이 정말로 논리적인지, 그리고 도대체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는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세 주석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범주의 큰 분류에서 세 번째 항목들은(전체성, 제한성, 상호성, 필연-우연) 앞의 두 항목을 같이 고려함으로써 얻게 된다. 즉, 전체성이란 다수인 것들을 단일한 것으로 볼 때 얻게 되는 것이며, 제한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문장 자체는 제한과 부정이 같으나, 부정은 내가 와인을 싫어한다는 그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고, 제한은 나에 대해서 저 문장을 통하여 생각해 본다면, 나에게서 확정적인 것은 와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일 뿐이고, 이를 제외한 나의 다른 모든 부분들은 미정적이라는 것이다.]벤다이어그램에서 특정 부분을 제외한(부정한) 나머지 부분 전체가 실질적으로 어떠한지를 고려하는 것이며, 상호성이라는 것은 모든 실체들이 인과법칙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표상한 것이고, 필연이란 가능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것이 실제로도 세상에 현존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2) 분량-성질에 속하는 것들은 단항인 반면, 관계-양상에 속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데, 칸트는 이 이유로 전자에 속하는 것들은 수학적이지만, 후자에 속하는 것들은 역학적이라는 것을 든다. 3) 판단표에서의 관계와 (정언/가언/선언) 범주에서의 관계 간에는 (실체와 우유/원인과 결과/상호성) 특히 선언 판단과 (A거나 B거나 C...이다)상호성 간에는 상관관계가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칸트는 이에 대해서 선언 판단에서 각 항들, 곧 A, B, C와 같은 것들은 개별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 선언문이라는 맥락 하에서 다른 것들과 같이 고려되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며, 이는 실체들이 인과법칙에 따라서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관계로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주석을 단다. 칸트의 사례 적용의 누락은 차치 하더라도, 칸트가 시도하려 한것은 우리가 직관한 '현상'들이 어떤 규칙, 다시 말해, 범주에 의해서 정리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왜 이러한 범주가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칸트가 제시하는 두 번째 연역, 곧 범주에 대한 선험적 연역이다. >대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두 가지만이 있다. 첫째는 직관이요, 이것을 통해서 대상은 오직 현상으로서만 주어진다. 둘째는 개념이요 이것을 통해서 직관에 대응하는 대상은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진술한 것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첫째 조건 즉 오직 대상이 직관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은 객체의 형식상의 근거로서, 선천적으로 심성 속에 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감성의 이 형식의 조건과 반드시 일치한다. 현상은 이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무엇을 직관하도록 하지는 않더라도 대상 일반으로서 생각하도록 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선천적인 개념이 또한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대상의 모든 경험적인 인식은 반드시 이러한 개념에 합치한다. 이러한 선천적인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경험의 객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대저 그럴 적에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즉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과 상관한다. 왜냐하면, 범주에 의거해서만 그 어떠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생각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5-126,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의 인식에서 중요한 부분의 첫째인 직관은 선험적 감성론에서 언급하였고, 이제 이것이 어떻게 사고되는 것인가를 얘기한다. 즉, 어떻게 개념으로 인지되는지 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어떤 대상을 생각 할 때,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대상을 '개념화' 시킨다. 하지만, 사고되는 대상은 직관되어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기에 선행되어야 하고, 개념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추상화되어 사고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직관으로 들어온 대상과 언어의 개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들을 근본적으로 엮어줄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칸트는 '''범주'''를 그 직관과 개념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이 '''선천적으로''' 우리 정신안에 존재해야만 우리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개념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은 후천적이고 무작위한 것들 즉 무질서 한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개념화할 때, (언어적 명제의 논리적 정의만 보더라도 명확하겠지만)대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개념의 질서는 감관으로 얻어진 대상이 필연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고하는 마음안의 질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가 가능하려면(개념이 생성되려면), 감관을 통해서 대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이를 '''범주'''라 칭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에서 직관과 개념사이에 존재하는 작용의 공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존 로크]]'가 대표적인데, 그는 개념을 구성하는 그러한 근거가 직관, 즉 경험에서 유도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영국의 경험론자들의 일관된 견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에서 경험론을 배척하고, 다시 유럽 대륙의 합리론의 입장을 취한다. >이래서 모든 선천적 개념의 선험적 연역은 우리의 전 탐구가 인도받는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즉 선천적인 개념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조건으로 (경험에서 발견되는 직관을 위한 조건이건, 혹은 사고의 조건인건 간에) 인정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중략-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고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지성의 순수한 개념을 경험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지성의 개념을 경험에서 이끌어 내었고, 그것으로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있는 인식을 얻으려고 모험할 만큼, 자뭇 무조리한 태도도 취했다. 데이비드 휴움은 이러한 모험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개념의 기원이 선천적이어야 할 것을 인정은 하였다. 그러나, 오성이 자신 중에서 결합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대상에 결합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을 그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 그는, 오성 자신이 이런 개념을 통해서 오성의 대상이 발견되는 경험의 창립자 일 수 있겠다는 것을 착안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러한 개념을 부득이 경험에서 도출하였다.(즉 주관적인 필연성에서 다시 말하면, 습관에서 도출하였다. 이것은 가끔 되풀이된 심리적 연상인 까닭에 경험 중에서 생겼으나, 드디어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어지는 바다.) >-중략- >(로크와 휴움) 두사람이 착안했던 경험적인 도출은 우리가 가지는 선천적인 학적 인식인 '''순수수학'''과 '''일반자연과학 현실성'''과는 조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적 도출은 이 두 학문의 사실에 의해서 거부된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7,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초판과 재판을 통해서 중복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영역에서 칸트는 보다 적극적인 설명을 통해 감성과 지성을 설명한다. 칸트의 주장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래 문단을 주목하길 바란다. >감성과 오성이라는 양 극단은 구상력의 선험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전자는 현상을 주어도 경험적 인식의 대상을 주지 않겠고, 따라서 아무런 경험을 주지 않겠기에 말이다. 현실적 경험은 현상들의 각지, 연상, 최후에 재인(再認)에서 성립하거니와 이제 최후, 최고의 요소(재인,再認)에 있어서 현실적 경험은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개념들이 경험의 형식적 통일을 가능케 하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경험적 인식의 모든 객관적 타당성(진리성)을 가능하게 한다. >-중략- >'''이래서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 있어서의 질서와 합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이것들을 자연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면, 이것들은 자연 중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연의 통일은 현상들을 연결하는 필연적인 통일 즉 선천적으로 확실한 통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의)형식을 주되, 오성은 규칙들을 준다. 오성은 현상에 있어서 무슨 규칙을 발견하려고, 이것을 찾아내는 일에 항상 종사한다. 규칙은 그것이 객관적인 한에서 (그러므로 대상의 인식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한에서) 법칙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많은 법칙들을 알지마는, 그것들은 보다 높은 법칙들의 특수한 규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높은 법칙들 중에서 최고의 법칙은 '''선천적으로 지성 자신에게 생기고, 경험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니라, 현상들에 그 합법칙성을 주며, 이 때문에 바로 경험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현상들을 비교해서 (귀납적으로) 규칙을 작성하는 능력이 아니다. 지성 자신이 자연에 대한 입법자 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A125-126,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이 언급은 아마도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칸트는 종래의 철학자들, 특히 영국의 경험론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다. 칸트가 보았을 때, 인간의 인식이 형성한 모든 지식의 규칙성은 자연이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스스로가 창조하지 않은 어떤 선험적 원리를 통해서 규칙들을 '''창조'''한 것이다. 칸트의 이 주장은 상당히 과감한데, 여기에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아마도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만류인력의 법칙이라던지, 상대성이론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자연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작위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다는 말인가?''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논제를 좀더 전개하자면, '''만류인력은 관찰된 사실이 아니라 사고로 유추된 사실'''이다. 무슨 얘기냐하면, 실제로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을 지구 바깥에서 보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다시 말해, 사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사과의 낙하운동은 지구 중심을 향하여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바깥에서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본 것이고, 따라서 모든 천체에 작용하는 물리작용이라는 결과를 '사고'를 통해서 도출한 것이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든 무엇이든 간에 만류인력은 경험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그 경험을 통해서 연역되는 사고와 개념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 스스로가 자연원리의 입법자라고 평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왜 하나의 대상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른 개념을 도출하는지 이다. 위에서 말한 만류인력의 사례처럼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어떤이에게는 아무런 의미없는 하나의 현상, 어떤이에게는 사과가 잘 익었겠다라는 하나의 현상, 어떤이에게는 만류 인력이라는 물리적 작용이라는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이 각기 달리 보이기 때문에 나온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정신 안에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여 나온 결과인 것 이다. 뉴턴은 그 가운데에서 우주적 개념과 자신의 경험을 관계시켜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범주를 정의한다. >나는 미리 범주라는 말을 설명하여 두고자 한다. 범주란 대상 일반의 개념이요, 이런 개념을 통해서 대상의 직관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의 하나에 관해서 결정된 것으로 보아진다. 정언 판단의 기능은 주어의 객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논리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두 개념 중에 어느 것에 주어의 기능을 주고, 어느 것에 객어의 기능을 주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내가 만약 물체의 개념을 실체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실체 범주에 의해서 경험에서의 물체의 경험적인 직관은 항상 주어로만 보아지고 결코 한갓 객어로 보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정된다. 실체의 범주 이외의 딴 범주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8-12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영역 중에서 발췌 칸트가 말한바대로 정언판단이란 주어와 객어(서술어)의 관계이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는 단순한 정언명제이다. 여기서 주어는 소크라테스요, 사람이다는 객어(술어)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주어자리에 와야 한다는 것은 명제가 규정하지 못한다. 명제는 어떤 규정된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적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범주의 역할이 필요하다. 범주는 여기서 무엇이 주어가 되는 지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범주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대상의 여러 표상(여러 대상들의 성질 등)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지하게 하며, 명제는 그것의 성격을 서술하는 표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떤 대상 규정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여러 표상들을 먼저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능을 '''통각'''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표상들의 다양은 직관에서 주어질 수 었고, 직관은 감성적일 뿐이며, 즉 감수성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직관의 형식은 선천적으로 우리의 표상 능력 중에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주관이 촉발되는 방식 이외의 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양 일반의 결합은 감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고, 따라서 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 중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결합하는 것은 표상력의 자발성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자발성은 감성과 구별해서 지성(오성)이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에 -중략- 모든 결합은 오성의 작용이다. 이런 오성의 작용에 우리는 '''종합'''이라는 일반적 명칭을 부여한다. >-중략- >무릇 오성이 먼저 그 무엇을 결합하지 않았으면, 오성은 분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무엇은 '''오성에 의해서만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능력에 주어질 수 있기에 말이다. >-중략- >이런 통일은 결합의 모든 개념들에 앞서 있는 것이요, 단일성의 범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범주는 판단에 있어서의 형식 논리적 기능에 기인하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개념들의 결합, 따라서, 그것의 통일이 벌써 사고되어 있기에 말이다. 하기에 범주는 먼저 결합을 전제하고 있다. >-중략- >모든 생각 이전에 주어지는 표상을 직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다양은, 그것이 발견되는 바 동일한 주관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일과 반드시 상관한다. 그러나 이런 표상은 자발성의 작용이다. >그런 표상은 감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나는 이 표상을 '''순수통각'''이라고 불러서,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고, 또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기 외의 것의 것에서 끌어내질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자기의식은, 그것이 모든 딴 표상에 수반할 수 있고 또 만인의 의식에 있어서 유일하고 동일한 바, 내가 생각한다는 표상을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즉 직관에 주어진 다양에 대한 통각의 시종일관된 동일성은 표상들의 종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종합의 의식을 통해서만 그런 동일성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각종 표상들에 수반되어 있는 경험적 의식은 그 자신 산만한 것이요, 주관의 동일성과는 무관계하기 때문이다. -중략- 즉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종합적 통일을 전제하고 서만 가능하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29-133,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아까 예로 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이 명제를 규정하기 전에,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을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판단은 인지에 대한 결과이며, 명제는 그 판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을 우리가 지각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생김새나, 인종이나, 성격(인간의 면모 등으로서나)이나 등등의 성질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성질들을 각기 개별적인 것이고, 아무상관 관계 없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에게 그 성질들을 집어넣는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으로 '''결합 혹은 종합'''한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을 '''통각'''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작용이 우리 인식의 배후에서 모든 인식작용에 대해서 이루어 지는 것을 칸트는 ''''순수통각''''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는 명제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명제는 (칸트의 명증에 따르자면)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표상을 끄집어낸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이 명제를 사용하기 이전에 미리 소크라테스 라는 대상 안에 '사람'이라는 표상을 집어넣어야 한다. 명제는 그래서 판단에 의해서 제시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사물을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한가지 자연스런 의문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우주의 끝이라던지 영혼이라던지 사후 세계라던지 경험할 수 있거나 혹은 경험 이외의 것 까지 모든 사고할 수 있는 것에 이 '범주'가 적용되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범주는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오직 (감관에 의해서 경험되는) 사물에 대해서만 적용될 따름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래서 대상을 생각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결코 같은 일이 아니다. 즉,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대상 일반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범주)이다. 둘째는 대상이 주어지게 하는 직관이다.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이 주어질 수 없다면, 개념은 형식상으로는 생각이겠지만, 아무런 대상도 가지지 않을 것이요, 그런 개념에 의해서는 사물의 인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내가 아는 한에서, 나의 생각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중략- >허나 시공중의 사물은, 그것이 지각인 한에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경험적 표상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하기에 오성(지성)의 순수한 개념은, 그것이 수학에서처럼 선천적인 직관에 적용되는 때라도, 선천적 직관이 따라서 이것을 매개로 해서 오성(지성)의 개념이, 경험적 직관에 적용될 수 있는 일에 의하는 외에는, 범주는 직관을 통해서도 사물의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는다. '''즉 범주는 경험적 인식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만 쓰인다.''' >이런 경험적 인식이 객관적 경험이라고 일컬어 진다. 이렇기에 범주는 사물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인정되는 한이 아니라면,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47-148,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좀 쉽게 예를들어 설명하자. 앞에서 예로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가능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의 여러 표상들이 범주에 의해서 정리되고 종합되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자체가 우리가 경험 가능한 (비록 현재는 실제로 간접적일 지라도)대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에는 인력이 작용한다'라는 명제 역시도 사물이 끌어당겨지는 경험되는 직관적인 여러 현상이 '인력'이라는 명칭에 속하기 위해서 범주에 의해 그 개념이 종합되어져서 인지된다. 따라서, 우리가 언명하는 모든 경험적 사실에는 이 범주가 적용되거니와, 그렇지 않은 대상에는 이 범주가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범주는 직관으로 인지된 대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B125-126참조)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주는 감관의 대상에만 적용된다는 명제는 지극히 중대하다. 그것은 대상에 관하여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쓰이는 한계를 규정하기에 말이다. 이것은 선험적 감성론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 형식이 쓰이는 한계를 정했던 것과 같다. >시공은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감관의 대상에게만, 따라서 경험에만 타당하다. 이 한계를 넘어서서는 시공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공은 감관중에만 있고, 감관 바깥에서는 현실성이 없기에 말이다. >-중략- >만약 우리에게 비 감성적 직관의 객체가 주어졌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객체는 감성적 직관에 속하는 것을 도무지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 속에 있는 바 모든 객어에 의해서, 우리는 그런 객체를 확실히 표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객체의 직관 중에 그 무엇이 적극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소극적으로 객체의 직관이 무엇이 아니다, 없다 라고만 지적하는 일은 아무런 진정한 인식도 아니다. >-중략- >가령 실체의 개념 즉 주어로서만 존재하고 술어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해서,[* 쉽게 설명하자면, 이름은 있지만 그 내용이 뭔지 서술할 수 없는 것들. 가령 신이나 영혼이나 하는 것 등등은 칸트에 의하면 서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칸트가 무언가를 서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고 즉 경험했다는 것인데, 영혼이나 신이나 하는 것 등등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만 있을 뿐이다.][* 다만 이는 이론이성의 관점에서 신과 영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이성을 통해서는 이것들에 대해서 불가지론만이 주어질 수 있지만, 실천적 맥락에서는, 전지, 전선, 전능한 신과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요청(혹은 전제)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경험적 직관이 그 개념을 적용하는 경우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고 형식에 대응하는 어떤 사물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아는 바 전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4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제 몇가지 내용을 남겨두고 개념의 분석론이 마무리된다. 먼저 이해를 돕기위해, 여기서 지금까지 칸트가 다루었던 인식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감성은 직관을 행하는 인간 정신의 부분이요,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대상들은 우리의 정신 안에서 나타나는데, 이를 표상이라 부르며, 이 표상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원칙(내감, 외감의 형식)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지성(오성)을 통해서 그 대상들을 '판단'하는데, 이 판단에 앞서서 각 대상들의 여러 표상들은[* 가령, 앞서 소크라테스의 사례로 예를 들어보자면, 소크라테스는 가령 남자, 노인, 철학자, 등등의 여러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정신 안에서 '종합'되어야 하는데 이를 통각이라 지칭한다. 그리고 이 통각은 범주에 의해서 규준되어 그 질서에 맞게 대상의 여러 표상들을 종합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정리한다. >지성(오성)의 순수한 개념에 있어서의 다양의 종합 즉 다양의 결합은 단지 통각의 통일에만 상관하였고, 그런 까닭에 다양의 종합은 인식이 오성에 의존하는 한의 선천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였으며, 따라서 선험적이었을 뿐더러, 순전히 지성적(오성적)이기도 하였다. - 중략 - 그리고 지성(오성)은 선천적인 감성적 직관의 다양에 향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우리 인간의 직관 대상이 반드시 종속하는 조건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래서 한갓 사고형식으로서의 범주가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즉 대상에 적용된다.-중략- >감성적 직관의 다양에 대한 이러한 종합은 선천적으로 할 수 있고, 또 필연적이로되, 이런 종합을 형상적인 것 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것과 구별되는 것이 직관 일반의 다양에 관해서 한갓 범주 중에서 생각되는 종합 즉 오성의 결합이다. 그러나 형상적 종합과 지성적 종합의 양자가 다 선천적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딴 선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에, 그 두가지 종합은 선험적이다. >그러나 '''형상적 종합이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에만 즉 범주에서 생각되는 바 선험적 통일에만 상관할 적에, 즉 순 지성적인 결합에서 구별되어,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이라고 한다. '''구상력이란, 직관중에서 대상이 지금 있지 않지만, 대상을 표시하는 능력이다.''' -중략- '''구상력은 그것만이 오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을 오성의 개념에 줄 수 있는 주관적 조건인 점에 기본해서, 감성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은 형상적인 것으로서 지성적 종합에서 구별되어 있다. 후자는 오성에 의할 뿐이요, 구상력의 도움이 전혀 없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0-152,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칸트는 여기서 구상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조금 뜬금 없을 것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정확한데, 왜냐하면 칸트가 이 구상력에 대한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편인 원칙의 분석론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칸트는 앞으로 다루게 될 주제를 여기서 미리 정리를 위해 다룬 것이다. 아무튼, 칸트는 (통각의 작용인) 표상들의 근원적인 통일이 범주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를 토대로 우리는 지성의 판단 재료를 생성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고 판단한다고 해 보자. 그럼,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마음 속에 떠올려 보아야 한다.(구상, 재생이라는 종합(A100))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여러 표상들의 종합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것을 자발적으로 종합한다.(통각) 그 종합된 표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마음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소크라테스를 명명함과 동시에 그것의 재료들을 머릿속에서 불러내어 다시 그려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는 사고작용 즉 '지성'에 의한 결과이지 직관을 행하는 '감성'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규정하였다. 그래서 구상력은 감성에 속할 지언정 지성의 동시에 받아 작용하며, 그 내용들을 내용상 통일하는 '통각' 작용은 오성의 결과인 것이다.[* 구상력의 종합에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은 오성이다. 그리고 구상력의 선험적 종합에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은 순수한 오성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A119, 해당내용은 재판의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의 초판본 부분인데, 본문 서술에서는 재판과 중복되어 생략되었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항상 또 우리의 내심에서 인정한다. 선을 생각 속에서 먼저 실지로 그어보는 일 없이, 우리는 선을 생각할 수 없다. 동그라미도 먼저 생각 중에서 그려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한 점에서 서로 수직적인 세 선을 그어보는 일 없이는 삼차원의 공간을 표상할 수 없다. -중략- 주관의 작용으로서의 운동은, 따라서 공간에 있어서의 다양의 종합은, 우리가 다양한 공간을 도외시하고 내감을 형식상 규정하는 작용에만 주의할 때에, 비로소 계기의 개념도 산출한다. 즉 지성(오성)은 다양의 이러한 결합을 내감에서 발견하지 않고, 지성(오성)이 내감을 촉발함으로써 다양의 결합을 산출한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4-155,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제 칸트는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자아론'에 대해서 잠깐 다룬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대상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는 이성과 그 대상을 다시 불러일으켜 사고하는 이성은 별개의 이성이기 때문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이러한 직관하거나 사고하는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 즉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이 찾아온다.[* 철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이것이 이후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임을 알 것이다. 헤겔은 인식을 과정으로 도식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아 안에서 서술하려고 하였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어떻게 해서, 생각하는 자아가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주관으로서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자아와 같은 것이냐? -중략- 이 문제는, -중략- 자세히 말하면 직관과 내적 지각과의 객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보다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곤란성을 가지고 있다. >-중략- >표상 일반의 다양한 선험적 종합에 있어서, 따라서 통각의 종합적인 근원적 통일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현상하는 그대로도 아니요, 내가 내 자체인 그대로도 아니라 오직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식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표상은 생각함이요, 직관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인식하자면, 모든 가능한 직관의 다양을 통각이 하는 통일로 가져 가는 바 사고 작용 외에, 다양을 주는 바 일정한 종류의 직관이 필요하다. - 중략 - >따라서 나는 내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내 자신에 관한 인식을 가지지 않고 오직 '내가 내 자신에 현상하는' 그대로의 내 자신에 관한 인식을 가진다. >'''이래서 자기 의식은 아직도 도저히 자기 인식은 아니다.''' >-중략- 자기 인식을 위해서는 나는 자기 의식 외에, 즉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하는 외에, 나의 이 생각을 규정하도록 하는 내심중의 다양한 직관을 필요로 한다. '''나는 지성자로 현존하고 이 지성자는 그의 결합능력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나 지성자가 결합해야 하는 다양에 관해서는 지성자가 내감이라고 부르는 제한적 조건에 나는 복종하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이 지성자는 직관에 관해서 지성 자신에 단지 현상하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요, 그의 직관이 지성적일 경우에 인식될지도 모르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 할 수는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최채희 역, B158-159, 오성의 순수한 개념의 선험적 연역 중에서 발췌 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구이다'''' 라고 규정하려면 나에 대한 여러 직관, 개념들이 필요하게 된다. 가령, 나의 성격, 나의 가정 환경, 나의 외모, 나의 인종, 등등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외부에 의존하는 별개의 것들 즉 직관에 의존하는 것인데, 나는 누구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 자체는 이미''' 생각하고 있는 나''' 혹은 '''그 생각을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 현존하는 나 자신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식'''이라 부른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의 다양성으로부터 빌려온 나 자신의 개념에 대한 인식 자기인식은 흔히 자아관이라 부르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는 이성적 질서에 통일을 부여하는 자기자신은 아닌 것이다. 이 논변은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뭇 진지하며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서 자기 의식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주목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앞서 말한바 우리의 정신은 직관이나 통각, 사고, 판단 같은 별개의 정신작용으로 구분되며, 둘째, 우리의 정신이 다양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인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아가 분열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 심리학적으로 이런 작용이 불완전하게 발생한다는 사례도 있지만 그것은 별개로 하자.]은 이러한 다양성을 우리 내부에서 '통일'하고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기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